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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오후, 삶은 시래기를 사려고 동네 시장까지 걸어서 갔다. 산책도 할 겸.
길바닥에 플라스틱 바구니를 펼쳐놓고 그 안에 무, 양파, 대파, 찹쌀, 콩, 기장 등을 담아서 파는 할머니에게서 3천 원을 주고 삶은 시래기를 샀다. 비닐봉다리에 담겨있었는데, 다 팔고 한 개가 남은 거라고 했다. 아이고, 감사해라! 나도 몰래 그렇게 감탄사가 나왔다.
비닐봉다리에 든 삶은 시래기를 손에 들고 다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해는 기울고, 산뜻한 다홍빛 광채가 구름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럴 때면 내가 마치 유혹당하는 구름인 양 설렌다. 마음은 벌써 집에 도착해서 시래기 된장국을 끓일 생각으로 들끓는다. 발걸음도 가볍다. 구수하고 달달한 시래기 맛을 떠올리면 입에 침이 고인다. 절로 흥이 난다. 그러면 나도 몰래 생각 나는 옛 동요를 어린애처럼 흥얼흥얼 부르기 시작한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 거예요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인 속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십수 년 전 여름 휴가 때 경기도 양주의 불암산 아래 있는 성 베네딕도 요셉 수도원에 나흘간 머물 때였다. 이른 아침 창밖에서 동요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틈으로 몰래 내다보니 나이가 지긋한 수도사였다. 뭐가 그리 기분 좋은 건지 풀밭 사잇길을 걸어오면서 청아한 음성으로 동요를 부르는 것이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거예요.
그때 늙은 수도사의 동요를 듣던 나의 마음은 기쁘고, 설레기도 했지만 슬프기도 했다. 갑자기 눈물이 글썽했다.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던 40대 어린 나에게 동요를 부르면서 아침 산책을 하는 노년의 수도사가 부끄러움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지금처럼 기분이 좋을 때나 기분이 우울할 때면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이라는 동요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름 모를 그 여름 아침의 수도사님께 감사!
아무튼 날씨가 추워지니까 시래기 된장국 생각이 난 거고, 그동안 통 입맛이 없어 먹지를 못하다가 입맛이 돌아오니까 식탐까지 생긴 것이다. 신나는 일 없이 지내오던 내가 시래기 된장국 때문에 살맛이 나다니! 삶은 시래기가 담긴 비닐봉다리 하나 달랑 손에 들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나의 머릿속은 벌써 냉장고에서 마른 멸치를 꺼내 육수를 내고, 쌀을 앉힐 때 뜨물을 받고, 대파와 양파를 썰고, 풋고추도 썰고, 냉동실에서 다진 마늘 꺼내고, 된장 한술 퍼내어 놓고…… 조리하는 일로 신난다. 생각은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 강가로 날아오는 시베리아의 철새 민물가마우지처럼. 어린 시절 엄마가 끓여주던 시래기 된장국이 눈에 선하다.
눈 내리던 겨울 저녁, 밥상에 올라온 뜨거운 시래기 된장국은 보기만 해도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모락모락 올라가는 김이 춤을 추는 것 같았는데 하얀 누에 실같이 눈부셨다. 밥 한 숟가락에 시래기 된장국 한술을 떠먹던 그때야말로 모든 것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시래기 된장국 한 그릇에 만사가 들어있구나! 햇빛과 바람과 비와 천둥이 지나갔구나!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시래기 된장국의 신비에 미소가 돈다.
플라스틱 바구니에 남아 있던 삶은 시래기 한 봉다리도, 쭈그리고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만 같은 노점상 할머니도, 3천 원을 꼭꼭 주머니에 챙겨 넣던 손길도. 아! 엄마를 만나고 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도 하늘 가득 번져 오르고 있는 눈부신 다홍빛 세계…… 그 모든 것을 다 가진 내가 아닌가!
3천 원짜리 삶은 시래기 한 봉다리를 손에 들고 집으로 가는 길이 구름 위를 산책하는 기분이다. 지금이 가장 거룩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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