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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7 (화)

[유효상 칼럼] 왜 피로스 왕은 승리하고도 눈물을 흘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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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유효상 유니콘경영경제연구원장 /사진=유효상


기원전 3세기 그리스 북서부 지역의 작은 왕국 에페이로스의 군주 피로스 1세는 로마를 비롯한 여러 국가를 침공해 뛰어난 용맹과 전술로 연승을 거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병력의 손실을 입은 데다, 정치적 안목이나 전략적 식견이 부족해 수많은 적을 만들었으며, 비록 모든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목표였던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지배는 이루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쇠퇴하다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여기서 '싸움에서 이겨도 별 이득이 없이 손해만 큰 승리, 처음부터 싸우지 않은 것만도 못한 승리, 사실상 진 것이나 다름없는 승리'를 뜻하는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가 유래되었다.

1950년대에 멕시코 만의 석유 시추권 입찰이 있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생각한 많은 회사들이 입찰에 참여했다. 당시는 정확한 석유 매장량을 측정할 방법이 없어서 어림짐작으로 매장량을 가늠하고 낙찰을 받기 위해 엄청나게 높은 금액을 써낸 회사가 시추권을 갖고 갔다. 그러나 실제 매장량은 기대와는 달리 너무 적어서 최고가를 써낸 회사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렇게 경쟁에서는 이겼으나 경쟁 과정에서 과도한 비용이나 대가를 치르는 바람에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리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 생겨났다. 바로 '승자의 저주'다. 피로스의 승리와 비슷한 개념으로 쓰인다.

피로스의 승리나 승자의 저주는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난다. 대표적으로 금호아시아나그룹 사례를 들 수 있다. 2006년과 2008년에 무리하게 인수한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으로 인해 자금난으로 그룹 전체가 휘청거리다, 결국 인수한지 몇 년도 안 돼 대우건설과 대한통운뿐만 아니라 기존 계열사인 금호렌터카, 금호종합금융, 금호생명,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은 물론이고 그룹의 모태인 금호고속까지 매물로 내놓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그룹 회장의 형제 간 경영권 분쟁도 발생했다. 이러한 것이 시발점이 되어 결국 핵심 계열사인 아시아나항공을 매각하면서 사실상 그룹이 해체됐다.

작년에는 삼성전자가 반도체 경기가 다운사이클 국면에 접어들면서 수요가 급감했지만, 시장의 기대와는 달리 생산량을 줄이지 않으면서 경쟁사는 물론이고 삼성전자에도 엄청난 부담을 안겼다. 시장 점유율은 지켰지만 결국 천문학적인 적자를 기록했다. 이에 대해 해외 언론은 '삼성은 피로스의 승리를 원하는가'라는 비판적 기사를 싣기도 했다.

또한 해외에서 거액의 투자를 받은 카카오엔터테인먼트는 상장을 위해 SM엔터테인먼트를 인수하기로 하면서, 하이브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지나치게 높은 금액으로 주식을 매입하였으며, 인수 과정에서 행한 여러 불법행위로 인해 그룹의 최고의사결정권자인 김범수 의장이 구속되기도 했다.

금년 1월 시작된 창업주 가족 간 경영권 분쟁이 1년간 지속되고 있는 한미약품은 주가가 25% 떨어졌으며, 당기순이익도 전년대비 44%나 감소했다. 이들 가족 간에도 고소, 고발이 남발되어 극한 대립이 계속되고 있으며, 승자의 저주를 우려한 국민연금이 10%를 보유한 주주로서 조만간 있게 될 임시주총에서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를 예고했다.

한편, 금년 8월 시작된 세계적인 비철금속 제련회사인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놓고 다투는 이 분쟁은 어느 쪽도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지 못한 채 4개월 동안 진흙탕 싸움만 반복하고 있다. 1949년 장병희, 최기호에 의해 공동 설립된 영풍그룹은 계열사 중 고려아연을 최씨 일가가, 전자 계열사를 장씨 일가가 맡는 분리 경영을 해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려아연은 비철금속의 수요 증가로 인해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면서 영업이익 1조 원 이상의 엄청난 현금 창출력과 더불어 시가총액 10조 원이 넘는 우량 기업으로 성장한 반면, 정작 모회사인 영풍은 시가총액이 8000억 원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고려아연은 최근 몇 년 간 두 자릿수 성장률을 이어가면서, 지난해엔 10조 원에 육박하는 매출을 기록하기도 했다. 연간 기준 조 단위 영업이익도 꾸준히 내왔다. 미래 전망은 더욱 밝다.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던 이차전지, 자원순환사업, 신재생에너지 등에서 성과를 낼 시점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2022년 말 고려아연 창업주 3세인 최윤범이 취임하면서 두 가문 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였다. 회사 유보자금으로 계속해서 미래 먹거리를 위한 신규 사업을 추진하려는 최 회장과 투자보다는 배당을 늘리라는 영풍 측 주장이 팽팽히 맞서면서 본격적으로 경영권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영풍 측이 사모펀드인 MBK파트너스와 손을 잡고 적대적 M&A를 선언하였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경영권 분쟁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국면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는 사이 50만 원대의 주가는 경영권 분쟁 과열로 무려 400% 가까이 오르며 200만 원을 넘기기도 했다. 12월 16일 현재 주가는 아직도 2배 이상 오른 120만 원대에 머물고 있다.

양측 모두 수조 원을 투입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물러날 수 없다. 상대를 향한 민, 형사상 고소 고발이 급증한 상태라 감정의 골 또한 깊다. 그러나 경영권 분쟁 장기화는 임직원과 투자자를 비롯한 모든 협력 생태계에 상처를 주고, 미래 성장률을 저하시키며 기업 이미지도 실추시키고 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이 사태가 마무리되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국가의 미래를 위해 핵심기술을 보유한 기업은 보호되어야 하며, 특히 해외로 넘어가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최종 승자가 '고려아연'이란 전리품을 얻게 되겠지만, 지금까지 양측이 입은 상처만으로도 '진정한 승자'를 찾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올해 상장기업 경영권을 둘러싼 다툼이 곳곳에서 벌어지며 분쟁 건수가 역대 최대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규모가 큰 기업을 둘러싼 분쟁이 두드러졌다. 작년에 비해 42%나 늘어난 것이다. 상속 과정에서의 가족 간 갈등, 동업자 간 갈등, 최대주주와 2대 주주 간 지분 싸움 등 유형도 다양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러한 분쟁에 고려아연 사례와 같이 사모펀드가 그 중심에 서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영권 다툼을 벌이게 되면 거액의 자금이 필요한데, 2004년 도입된 경영참여형 사모펀드가 매년 20%씩 성장하며 작년 말 기준 무려 136조 원을 운용하고 있어서, 지속적으로 거액의 투자처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모펀드가 경영권 분쟁에 개입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금융감독원장은 "과거에는 금융당국이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지배에 대한 고민을 해왔다면, 이제는 금융자본의 산업자본 지배에 대한 부작용을 고민해 봐야 한다"며 "특정 산업 군은 20~30년 긴 호흡으로 봐야 하는데, 5~10년 사이에 사업을 매각해서 수익을 내야 하는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지배하게 되면 중장기적 관점에서 주주 가치 훼손이 있을 수 있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경영권 분쟁은 승리를 해도 엄청난 내상과 외상을 입게 되기 때문에 극도로 신중을 기해야 한다. "슬프다. 내가 원했던 건 이런 상처뿐인 영광이 아니었다." 승전 축하 자리에서 수많은 장수와 병사를 잃은 피로스가 눈물을 흘리며 남긴 말이다.

유효상 유니콘경영경제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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