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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 (월)

[기고]악의 무리를 쳐부수고 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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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집단 간의 윤리적 관계와 대화 가능성, 타자화 등의 주제를 고민하는 정치학자 입장에서 역사의 가장 난감한 국면은 그 타자가 진짜 노골적인 ‘악’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계기들이 아닐까. 스탈린의 굴라크의 실체가 전해지고,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가 폭로되고, 탈레반의 학정과 알카에다의 테러행위가 진면모를 드러냈을 때 등등. 그리고 냉전과 테러와의 전쟁에서 비로소 ‘선’이 승리했을 때, 매카시즘이나 오리엔탈리즘 따위에 대한 경계나 고민은 깨끗하게 사라지고 역사의 정방향에 서 있다는 행복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그다음에 길게 이어진 비극이 바로 우리가 겪은 탈냉전 30년의 궤적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국면에서 정말 엉뚱하게도 필자의 시선을 끈 인물은 안희정이었다. 그는 당시 궤멸적 타격을 입은 보수진영 같은 상대조차도 최대한의 “선의”를 갖고 이해해 줄 필요가 있다는 얘기를 자꾸 늘어놓아 “양념”의 표적이 되었다. 이후 씻을 수 없는 과오가 드러나며 그는 정치적 자멸의 길을 걸어버렸지만, 만약 그런 선의 담론이 문재인 정부에서 일정 정도 힘을 발휘했다면 그 후의 적폐청산 과정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같은 쓸데없는 가정을 해보곤 한다.

그리고 여기 역사의 장난처럼 또 한 명의 순수 빌런이 등장했다. 이미 만천하에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그의 악함은 차고 넘치게 증명되어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고, 적절한 사법절차를 거쳐 곧 ‘처단’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렇게 또 속 시원하게 악의 무리를 쳐부수고 나면, 그의 부인을 ‘쥴리’라 부르며 시시덕대던 여성혐오적 관음증도 함께 소멸될 것인가? 계엄령이라는 어마어마하고 시대착오적인 ‘음모론’이 극적으로 현실화된 세상 이후에는 또 어떤 가짜뉴스들이 창궐하여 기승을 부릴까? 다시 척결된 ‘적폐’들은 또 어떠한 원한의 정치를 가동시킬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윤석열 정권 이전의 시대가 우리가 돌아가야 할 태평성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 시절의 정치 양극화와 포퓰리즘이 윤석열이라는 안티 히어로와 극우 반동의 힘을 낳았다. 그가 신봉했고 결국 자신을 파멸로 이끈 부정선거라는 가상현실이 다름 아닌 ‘진보’ 진영에서 먼저 탄생했음을 특기해야만 한다. 나아가 언젠가부터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이나 국가론 같은 구조적 문제의식은 소멸해 버리고, 선악 대결의 이분법적 세계관과 음모론으로 점철된 서사 형태로 개혁 담론이 조악하게 축소되어 버렸음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미친 왕을 몰아내고 성군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진보세력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수박을 색출하고, 검찰독재를 타격하고, 토착왜구를 척결한다고 해서 빈부격차도, 저출생도, 북핵도, 미·중경 쟁도, 기후변화도, 아니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남는 것은 오직 도파민 중독사회일 뿐이다. 답이 명확해 보이는 역사의 순간에도 자꾸 머리 한쪽이 지끈거리는 것은 마치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처럼 우리 모두가 실은 계속해서 무한반복되는 악몽의 루프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 때문일 것이다.

경향신문

차태서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차태서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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