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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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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 전부터 갸우뚱…제주 귤 잔뜩 실은 배, 326명 품고 바닷속 침몰[뉴스속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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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호 침몰 사고 후 시신 운구의 모습 /사진=뉴스1(한국향토문화대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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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54년 전인 1970년 12월 15일 승객 311명과 선원 20명 338명이 탄 남영호가 침몰했다. 전날 저녁 제주에서 출발해 부산을 향하던 길이었다.

이 사고에서 구조된 사람은 총 12명으로, 나머지 326명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남영호 침몰 사고는 대한민국에서 6·25 전쟁을 제외하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창경호 침몰 사고에 이어 세 번째로 사망자 수가 많은 참사로 기록됐다.


매달 10회 정기 운항하던 여객선 돌연 침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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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호 조난자 위령제가 2013년 12월 15일 제주 서귀포시 상효동 남영호공동묘지에서 열렸다./사진=뉴시스


남영호는 중량 362톤, 길이 43m, 폭 7.2m, 시속 15노트, 정원 302명이 승선할 수 있는 철선이며, 남양상사가 경남조선에서 건조했다. 1968년 3월 5일 서귀포~성산포~부산 간 노선을 첫 취항 했고, 매달 10회씩 정기적으로 왕복 운항하던 정기 여객선이었다.

사고 발생 전날인 1970년 12월 14일도 오후 5시께 서귀항에서 승객 200여명과 연말 성수기용 감귤을 싣고 출항했다. 이후 성산항에서 승객 100여명과 화물을 더 싣고 밤 8시 10분께 부산을 향해 출항했다.

남영호가 성산항을 떠난 지 5시간 25분이 지난 12월 15일 새벽 1시 15분, 전남 여수에서 동남쪽으로 28마일(약 52㎞) 떨어진 해상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심한 바람이 남영호의 우현 선체에 몰아쳤다.

그러더니 갑판 위에 쌓아놓은 감귤 상자가 좌현 방향을 쏟아졌다. 이 순간 중심을 잃은 선체가 좌현으로 넘어가며 침몰하기 시작했다. 남양호는 이에 정상 속도인 15마일을 10마일로 줄여 계속 항진하려 했으나, 결국 전남 여수시 소리도 인근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사고가 발생 후 긴급구조신호(SOS)를 타전했으나 해상 부근 어느 무선국에서도 이 신호를 포착하지 못했다. 인근에 있다 조난 신호를 받고 달려온 일본 해상보안청 구사가키호가 일본 어선과 함께 생존자를 구조했으며, 동시에 규슈의 해상보안청을 통해 한국 해경에게 사고 소식을 알렸으나 무시당했다.

한국 해경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사고 발생 12시간이 지난 오후 1시 50분께였다. 구조자는 총 12명이며, 해경이 구조한 인원은 고작 3명밖에 되지 않았다. 정부는 사고 발생 40시간 만에 '추위로 탑승자들의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결론지었고 이틀째 시신 수색을 중지했다. 일주일 후 정부는 '가라앉은 선체가 당시 기술로 인양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300여구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감귤 상자 과적, 승객 정원 초과…이미 기울어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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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서귀포시 정방폭포 주차장 인근에 설치된 희생자 명단 비석. /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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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호는 일차적으로 하중을 감당하지 못해 전복된 것으로 보인다. 선박회사 측은 3개 화물 창고가 모두 감귤 상자로 채워지자 선적이 금지된 앞 하창 덮개 위에 감귤 400여 상자를 더 쌓아 실었다.

또 중간 갑판 위에도 감귤 500여상자를 쌓았다. 이에 서귀항을 출항할 때부터 이미 선체 중심이 15도쯤 기운 상태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상태에서 성산항에 도착하자 다시 화물을 더 실었던 것이었다.

여기에 당시 정원이 302명이었음에도 338명을 태웠다. 당시 남영호가 출항하기 전날까지 폭풍 주의보가 발효돼 4일간 제주 지역에 묶여있던 승객과 감귤 등 화물 400톤 이상을 무리하게 실은 상황이었다.

이외에 선장이 항해 10일 전 갑자기 바뀌었던 점도 사고 원인으로 지목됐다. 서귀포~부산 간 항로에 경험이 부족한 을종 이등 항해사(지금의 5급 항해사) 면허를 가진 강 씨가 선장 임무를 맡았던 것. 운항 과실과 더불어 낙후된 선박 시설 및 기관, 무전 시설 또한 침몰 원인으로 꼽혔다. 결국 이를 단속해야 할 경찰과 해운 당국의 감독 소홀로 발생한 사고였다.


사망자 326명…역대 세 번째로 사망자 많은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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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서귀포시 정방폭포 주차장 인근에 세워진 남영호 위령탑. /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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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귀항에는 임시대책본부가 설치돼 유족 1000여명의 통곡 소리로 아수라장이 됐고 남영호가 떠났던 자리에는 위령탑이 세워졌다. 위령탑은 1982년 서귀포항 임항도로 개설로 인해 서귀포시 돈내코 법성사 인근으로 옮겨졌다.

대책본부에서는 침몰로 인한 피해는 현금만 해도 1억원이 넘고, 화주와 선박 피해를 합쳐 2억원가량이 될 것으로 추산했다. 화물 피해는 8300만원가량으로 검찰에서 조사됐다.

사고 발생 3일 후인 12월 18일, 사고에 대한 책임으로 박경원 내무부 장관과 백선엽 교통부 장관이 국무총리에 사의를 표명했다. 또 임검 경찰관 4명이 직무 유기 혐의로 구속되고 서귀포 경찰서장이 입건됐다.

다음 해 6월 8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선장은 금고 3년, 선주는 금고 6개월에 벌금 3만원, 통신장은 벌금 1만원이 선고됐다. 이후 1972년 2월 16일 대법원에서 열린 상고심에서 선장에 금고 2년 6개월 형이 확정됐다.

이소은 기자 luckysso@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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