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혁 전 주베트남 대사 |
윤석열 대통령을 향한 탄핵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내년 수교 60주년을 맞는 한·일 관계에도 짙은 안개가 드리웠다. 윤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로 정체됐던 한·일관계를 일거에 회복했지만, 비상계엄이라는 폭풍으로 정상들의 교류 자체가 어려워졌다. 당장 스가 요시히데 전 일본 총리가 이달 중순 예정했던 방한을 취소했고, 내년 1월 윤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정상회담 추진 계획 역시 불투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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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경험
공든 탑 한순간에 무너졌지만
한·일 간 공통분모 늘려 가고
실용주의와 겸허함을 갖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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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외교에 오래 관여한 필자는 위로부터의 민주화를 완성한 일본과 달리 아래로부터의 민주화를 경험한 한국을 큰 긍지로 여겨왔다. 그런데 지난 3일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우리 민주주의를 훼손하려는 기도였다는 많은 평가를 들으며 참담함을 느낀다. 영국의 시사주간지인 이코노미스트지가 분류하는 민주주의 지수(democracy index)에서 한국은 2020년 이후 매년 완전한 민주주의(full democracy)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12·3 계엄 사태’로 인해 한국이 결함 있는 민주주의(flawed democracy)로 격하될 가능성이 커졌다. 국격과 외교력 손상까지 생각한다면 공든 탑이 무너진 결과라 아니 할 수 없다.
비상계엄, 한·일 관계 후퇴 우려
이쯤에서 한·일 수교 50주년이었던 2015년으로 거슬러 가보자. 당시는 위안부 문제 등을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이 갈등을 겪으며 양국 관계는 냉랭했다. 반면 윤석열 정부의 노력으로 한·일의 간극이 좁혀졌고, 내년 수교 60주년은 밝은 미래를 향한 양국 협력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가 많았다. 적어도 비상계엄이 발표되기 직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국회가 윤 대통령의 탄핵안을 가결한다면 당분간 외교는 올스톱 할 위기에 처한다. 한·일 관계 역시 어디로 향할지 불투명해진다. 설령 어떤 식으로든 윤 대통령이 직무를 이어간다고 해도 한·일 관계와 관련한 기존 동력을 회복할지 의문이다. 정권이 교체돼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대일 정책의 윤곽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외교, 특히 한·일 관계를 손 놓고 있을 만큼 한국이 처한 상황이 한가하지 않다. 한국은 일본과 더욱 긴밀하게 협의하고 협력하는 체계를 구축하는 게 시대적 요구라 본다. 일본이 좋든 싫든 말이다. 미국 리더십의 교체를 계기로 미·중 대결은 더욱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 미·중 대립의 후폭풍으로 경제적으로 한·일 양국에 큰 이익을 가져왔던 중국이 이제는 강력한 경쟁 상대가 될 수 있다. 또 대만 해협을 둘러싼 중국의 움직임은 한·일 모두에게 잠재적 안보 위협이다. 그동안 미국은 규범에 근거한 국제 질서를 표방해 왔는데, 다음달 트럼프 정권이 출범하면 오히려 규범 파괴자의 모습을 보일 우려마저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과 일본을 향해 더 큰 군사적, 경제적 부담을 요구하고, 북·러에 대해서는 편의적, 거래적인 협상에 나설 태세다. 더구나 북한의 우크라이나 전쟁 파병으로 북·러의 군사적 밀착은 통상적 동맹 관계의 수준을 넘어섰다. 우리 국익을 위해 일본과 협력해야 할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커진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게 능력
윤 대통령의 거취가 어떤 식으로 정해지더라도 당분간 한국은 비정상의 시간을 겪어야 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수교 60주년을 활용한 한·일 관계 발전의 모멘텀을 유지, 강화해 나가려는 노력을 멈춰선 안 된다. 외교부는 언제든 셔틀 외교를 포함해 정상 외교가 가동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민간인들의 협력 노력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게 세계 10위권 국가인 한국 외교가 해야 할 일이다.
대통령 선거를 치러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다면 국익 지향의 생산적인 한·일관계를 추구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집권 초기부터 한·일관계가 꼬이면 양국 관계뿐 아니라 한국 외교 전반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비상시국을 거쳐 탄생한 새 정부가 생산적 한·일 관계를 추진하지 않으면 가뜩이나 약화한 우리 외교의 토대를 회복하기 어렵다.
한·일 관계가 좋은 상태로 출발해야 우리 안보의 근간인 한미동맹, 그리고 한·미·일 협력도 더욱 강화할 수 있다. 특히 트럼프 정권의 불예측성이 한국에 미칠 잠재적 리스크를 고려할 때 이제는 한반도와 동북아 안정을 위해 한·일이 함께 한·미·일 협력을 강화해 나가는 추동력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한·일 양국이 가지고 있는 트럼프 당선인 측과의 네트워크와 정보 공유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중국이란 변수에 대한 대비 차원에서도 한국과 일본은 힘을 합쳐야 한다. 중국이 지역의 안정과 발전에 부정적 요인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이념적, 지정학적으로 비슷한 한·일의 긴밀한 협력은 필수다. 좋은 한·일 관계는 한·중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도 중요한 지렛대가 될 수 있다.
과거사, 국익과 분리 대응해야
물론 한·일 관계에는 과거사라는 큰 걸림돌이 있다. 비상시국에서 일본의 과거사 문제를 놓고 서로 다른 입장의 목소리가 커지며 남남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 과거사를 무조건 덮겠다는 인상은 국민들의 반발만 불러올 뿐이다. 윤 대통령이 한·일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진솔한 설명과 이해를 구하는 과정이 없었다는 점은 오해를 낳기 충분했다. 그렇다고 과거사 해결을 양국 관계 개선의 필수 조건으로 삼는다면 결국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다.
지난달 사도광산 추도식 사례에서 보듯 일본 정부는 더 이상 과거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 정부는 과거사에 엄밀히 대응하면서도, 국익 추구를 위한 한·일의 교집합을 철저히 따지는 투 트랙 접근의 지혜가 필요하다. 국제질서와 동북아 안보의 전환, 저성장, 저출산, 지정학적 도전 등 한·일 간 공통분모를 늘려나가면 과거사 해결이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일본을 이기기 위해 일본과 협력해야 한다는 실용주의, 그리고 일본은 아직도 배울 점이 많은 선진 대국이란 겸허함을 갖는 것이 수교 6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국민이 가져야 할 자세다.
이혁 전 주베트남 대사·리셋 코리아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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