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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 (금)

[유석재의 돌발史전] 12·3 계엄령의 원형이 1980년 5·17 쿠데타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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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표정은 둘다 단호해 보이지만, '성공'과 '실패'의 길은 확연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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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은 대통령이 선포한 계엄령이 국회 결의에 의해 해제된 날이었습니다. 아침에 강원택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에게 의견을 들으려고 전화를 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지도자가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가진 결과다. 전두환조차 1987년 6월에 군 투입을 못했는데, 시민들이 저항하면 군 통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 이거 정말 쪽팔려 죽겠다. 대통령이 전혀 주변 사람들 말을 듣지 않는 건지, 특정 주변 사람들 말만 듣는 건지 모르겠다. 혹시 들은 게 있으면 나한테 좀 알려 달라.”

그리고 다음날인 5일, 강 교수는 제게 짧은 문자 한 통을 보냈습니다.

‘유 기자, 제5공화국 책 184-213쪽 다시 읽어 보세요. 이번 일 관련해서.’

‘제5공화국’이란 지난 5월 강원택 교수가 낸 연구서의 제목입니다. 그보다 몇 달 전에 영화 ‘서울의 봄’을 통해 주목을 끌었던 것이 5공이지만, 학계에서 지금까지 활발히 연구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강 교수는 이 책에서 ‘5공 시기가 역설적이지만 한국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합니다. 5공을 거치고 나서야 한국은 군부 권위주의를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유일한 통치 원리로 받아들이게 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저 수십 년 전의 역사를 다룬 줄만 알았던 이 책이 연말에 다시 소환될 줄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강 교수가 말한 책의 184-213쪽이 뭔지 다시 들춰 봤습니다. 그것은 1980년 5·17 비상계엄 확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1979년 10월 27일 새벽에 선포된 비상계엄령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전국에 계엄 선포가 되면 계엄사령관이 대통령의 명령만 받게 되지만, 전국 중 일부라도 제외되면 계엄사령관은 국방부 장관의 통제를 받습니다. 정승화 사령관의 권력이 비대해질 것을 우려한 노재현 국방부 장관의 건의가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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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연행된 직후인 1979년 12월 13일 새벽, 탱크를 앞세우고 중앙청 앞에 진주한 신군부측 병력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1979년 12월 12일 정승화 사령관을 체포하는 쿠데타를 통해 군권을 장악했습니다. 군권? 그렇습니다. 이것은 아직까지 ‘군권’을 벗어나지 못한 군내의 쿠데타였습니다. 최근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은 12·12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1980년 초 전두환을 암살하려는 작전을 실행하려 했다고 합니다. 이를 눈치챈 전두환은 최대한 권력욕을 드러내지 않고 은인자중했다는 것입니다. 제 기억으로도, 당시 ‘서울의 봄’ 시절에 혜성처럼 나타나 가장 각광 받았던 스타는 전두환도 3김도 아닌 이주일이었습니다.

그게 5월 17일까지였습니다.

전두환의 ‘은인자중’은 1980년 4월 무렵 끝나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대학가의 시위가 ‘전두환 퇴진, 계엄 해제’ 같은 정치적 문제로 번질 때였습니다. 강원택 교수는 권정달의 증언에 주목합니다. “보안사 핵심 참모였던 허화평, 허삼수, 정도영, 이학봉과 저는 이런 시국 상황에서는 군부가 전면에 나서 강력히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습니다.”

5월 초 전두환의 지시로 ‘시국수습방안’이 만들어집니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를 주요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 초안이 만들어졌습니다. 다시 권정달의 증언입니다.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가보위비상기구를 통해 내각을 조종, 통제하는 기능을 군부가 수행하는 과정에서 헌법상 계엄 해제 요구권을 가지고 있는 국회가 계엄 해제를 요구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김종필 공화당 총재마저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면서 계엄 해제를 찬성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 신군부에 의한 정국 장악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국회 해산 및 주요 정치인 연행 등 조치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강 교수는 이렇게 분석합니다. ‘내용만 봐도 이 수습 방안은 쿠데타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계엄 확대로 군이 사실상 직접 통치에 나서게 되고, 비상기구는 기존 행정부를 대체하게 되고, 국회 해산으로 정치 활동은 금지되는 것이었다.’

이 쿠데타에는 그것을 정당화할 만한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이미 전두환이 장악하고 있던 중앙정보부는 ‘5월 15일부터 20일 사이에 북한 특수부대 요원이 후방 지역으로 침투할 것’이란 정보를 입수하고 주영복 국방부 장관과 신현확 총리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는 5월 10일 ‘5월 남침설은 신빙도가 희박하다’고 판단했고, 같은 날 최규하 대통령은 중동 순방을 위해 출국했습니다. 대통령이 출국했다는 것은 이 정보가 거짓이었다는 얘기였습니다.

5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방문에서 귀국한 뒤 밤 11시에 청와대에서 시국 관련 대책회의가 열렸습니다. 주영복 장관과 전두환은 북한군 침공 가능성을 말하면서 계엄 확대를 건의했습니다. 다음날인 17일 오전 11시 전군 지휘관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후 신현확 총리,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배석한 자리에서 주영복 장관은 대통령에게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 국회 해산’ 등 시국수습방안을 보고했습니다.

최 대통령은 비상계엄 확대 이외의 방안은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9시 45분 비상계엄 확대 안건을 의결하기 위해 임시국무회의가 열렸습니다. 국무회의 분위기는 살벌했습니다. 노태우 수경사령관 지시에 의해 이현우 30경비단장은 340여 명의 병력을 출동시켜 광화문 앞에 전차 4대와 장갑차 등을 배치해 중앙청을 에워싸고 외부인 출입을 통제했으며, 성환욱 헌병단장은 250여 명의 헌병을 출동시켜 중앙청 현관에서 국무회의장 입구까지 집총한 병력을 1m 간격으로 도열시켰고, 계단에는 한 계단에 1명씩 집총한 헌병을 배치했습니다. 중앙청 각 사무실을 수색해 일하던 공무원들을 5층 방에 감금하고, 외부에서 중앙청으로 연결되는 전화선을 절단해 국무회의장을 완전히 차단했습니다.

주영복 장관은 헌병단 병력의 삼엄한 경비를 보고 ‘국방부 장관인 내가 들어가는데도 무서워서 다리가 떨렸다’고 증언했습니다. 국무회의의 결과 비상계엄은 전국으로 확대됐습니다. 계엄사령관과 군이 총리 등 내각을 제치고 대통령과 직접 계엄 업무를 논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유신헌법 54조 5항은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현행 헌법의 77조 5항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완전히 똑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시 3김이 계엄 해제에 동의한 상태였고 국회는 5월 20일 임시국회를 소집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때 국회가 개원하면 계엄령 해제 요구가 통과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래서 신군부는 당초 5월 20일로 예정됐던 ‘거사’를 앞당겨 17일 24시(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와 모든 정치활동의 금지’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령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이랬습니다. 지금 다시 읽으니 좀 소름이 돋습니다.

‘군은 5월 18일 새벽 2시 30분 전국 92개 대학과 국회를 포함한 136개 주요 보안 목표에 계엄군 2만5000명을 배치 완료했다. 신군부는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이세호, 김진만, 김종락, 이병희, 오원철 등을 권력형 부정 축재 혐의로 연행했다. 김대중, 예춘호, 문익환, 김동길, 인명진, 고은, 리영희 등은 사회 혼란 조성 및 학생, 노조 소요 관련 배후 조종 혐의로 계엄사에 연행했다. 김종필과 김대중을 연행한 데 이어 김영삼은 가택 연금을 시킨 뒤 강제로 정치 은퇴를 선언하도록 했다. 국회를 포함해 모든 정치활동을 사실상 금지시켰다.

국회에도 33사단 101연대 소속 1개 중대 병력이 출동하여 18일 1시 45분 국회의사당을 점령했다. 그리고 20일 10시 경 국회의장이 공고한 104회 임시국회 개회식 참석을 위해 국회에 나타난 황낙주 등 국회의원 38명의 등원을 저지했다. 이처럼 5월 18일 국회 봉쇄, 20일 등원 저지, 17~20일 사이 주요 정치인 연행, 구금, 연금 등을 통해 정치활동을 전면적으로 금지시켰다.’

국회 점령이 일어난 그날, 날이 밝은 뒤 전남 광주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만, 이제와 5·17을 돌이켜 보면...

네, 실로 치밀하고 빈틈없으며 전광석화처럼 이뤄진 조치였습니다.

이제 한 가지만은 확실합니다.

쿠데타란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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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3월 3일 전두환 대통령과 이순자 여사가 제12대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참석인사들의 박수에 손을 들어 답례하고 있다. 아내가 와이셔츠 소매조차 다려주지 않은 어딘가 허술한 외모와는 달리 그는 무척 치밀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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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화평, 허삼수, 권정달 같은 생존해 있는 5·17 쿠데타의 주역들이 지난 3일 밤과 4일 새벽에 TV를 보고 있었다면, 이들은 아마도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아이고, 저 멍청한 녀석들…’이라며 탄식했을 것입니다. 12·3 계엄령 선포는 위헌이고 불법이며 폭력이었으며 고도의 대국민 협박이었다는 점에서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와 같지만, 완전히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친위쿠데타’나 ‘내란’으로 보기에는 그 진행 상황이 너무나 어설프기 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국민과 야당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다’는 것은, 그것이 설사 정말이라 해도 세계사에 남을 만한 희한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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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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