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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3 (월)

안과의사에서 독재자가 된, ‘시리아의 학살자’ 알아사드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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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3일(현지시간) 시리아 알레포에 있는 군비행장에 걸린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초상화가 실탄을 맞고 훼손돼 있다.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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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반군이 수도 다마스쿠스를 점령하면서 ‘피의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철권 통치가 막을 내렸다.

알아사드 전 대통령은 1965년 하페즈 알아사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 하페즈가 대통령직에 올랐다. 하페즈 전 대통령은 이후 30년간 집권하며 수많은 정적을 제거했고, 반대파에 고문과 처형을 일삼는 공포정치를 폈다.

차남인 알아사드는 ‘대통령 후계자’가 될 운명이 아니었다. 정치에 관심을 보인 형이나 동생과는 달리, 그는 과학과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어린 시절 온순한 성격이었던 그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페즈 전 대통령도 장남 바셀을 후계자로 점찍어뒀다.

그러나 1994년 바셀이 교통사고로 숨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하페즈 전 대통령은 다혈질이고 충동적인 성향이 자신과 닮은 막내아들 마헤르를 후임자로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마헤르의 나이는 27세에 불과했고, 고령이었던 하페즈 전 대통령은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영국에서 안과의사로 일하던 바샤르를 급히 불러들여 후계자로 삼았다.

2000년 하페즈 전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시리아 의회는 대통령 출마 연령을 40세 이상에서 당시 알아사드의 나이인 34세 이상으로 하향 조정했다. 그해 대선에 단독 출마한 알아사드는 99.74% 득표율로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임기 초반 알아사드는 아버지와 다른 정치를 펼 것이란 기대를 받았다. 정보통신 기술에 관심이 많고, 외국어에 능통하며, 자본주의와 세계화를 수용하는 유학파 대통령에 시리아 국민들은 희망을 걸었다고 한다.

그러나 2011년부터 이런 환상은 깨지기 시작했다. 아랍권을 휩쓴 민주화 혁명 ‘아랍의 봄’이 시리아에 번지면서다. 알아사드는 시위대를 “테러 세력”이라고 몰아붙이며 군중에 무차별 발포를 명령했다. ‘피의 독재자’, ‘시리아의 학살자’라는 오명에도 알아사드는 자국민에게 염소·사린가스 등 화학무기까지 살포해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이 같은 당국의 강경 진압으로 촉발된 내전이 14년째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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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반군이 중부 거점도시 하마를 점령한 다음날인 6일(현지시간) 반군이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찢어진 초상화를 밟고 서 있다.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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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이슬람국가(IS)가 등장한 것도 알아사드 정권에는 호재였다고 외신들은 분석했다. 반군을 “극단주의 세력”으로 규정하면서, 자신이 이들로부터 국가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선전전을 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리아 인권네트워크(SNHR)에 따르면 2011년부터 올해 6월까지 시리아 정부군에 의해 숨진 민간인(20만1290명)은 IS 공격에 의한 사망자(5058명)보다 40배가량 많았다.

반군이 수도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다음날인 8일 시리아 시민들은 알아사드 대통령의 초상화를 짓밟고 불태우며 환호하고 있다고 CNN은 전했다.

시리아 정치분석가인 마르완 카발란은 알자지라에 “시리아인들에게 알아사드는 형편없는 리더십으로 나라를 망가뜨린 정권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혜린 기자 cher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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