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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 (목)

[2030 플라자] 단풍과 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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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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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추위를 많이 탄다. 학창 시절엔 전교에서 겨울 교복을 가장 먼저 꺼내 입는 학생이었을 정도로. 펄펄 끓는 여름에도 가방에 항상 얇은 카디건을 들고 다니며 에어컨 바람을 피하고, 수족냉증 때문에 겨울에는 양말 위에 수면양말을 덧대 신는다. 이 때문에 나의 월동 준비는 10월부터 시작된다. 전기 매트를 꺼내고, 겨울 이불과 가습기를 꺼내고, 겨울옷을 싹 꺼내 며칠 내내 빨래를 돌리고 나면 준비가 끝난다.

근데 올해 날씨가 정말 이상하긴 한지, 아무리 기다려도 가을이 올 생각을 않더니, 겨울이 오는데도 한참이나 걸렸다. 미처 쌀쌀해지지 못한 날씨에 꺼내둔 전기 매트와 겨울 이불은 깊은 수면을 방해하고, 착실히 세탁해 둔 두꺼운 겨울옷들은 11월이 다 지나갈 때까지도 퉁퉁하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떠난 단풍 여행에 단풍이 들지 않아 푸릇푸릇한 풍경을 보고 돌아왔을 때까지도 사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겨울이 늦게 온다는 사실이 내게는 그리 나쁜 소식은 아니니까.

그런 나도 수능이 다가올 때쯤에는 조금 이상함을 감지했다. 수능을 치기 전에야 날이 조금 따뜻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수능 당일까지도 한파는커녕 낮 시간대에는 후끈후끈할 정도의 날씨가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납득하는게 어려웠다. 이제는 ‘수능 한파’라는 말이 사라지는 걸까. 매년 기사 사진으로 확인하는 수능 현장 사진은 롱패딩에 갇혀 김밥같이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수험생들이었는데, 올해는 얼핏 봐도 모두 가벼운 차림이었다. 11월이면 으레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캐럴도 마치 외국에서 맞이한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처럼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날씨로 계절을 감각하는 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되었다.

며칠 전, 드디어 첫눈 소식이 들려왔다. 반가운 마음에 우산을 챙길 겨를도 없이 나선 집 밖은, 그러니까 첫눈답게 옅은 눈바람이 날리고 있을 것이라 예상한 내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11월에 때이른 폭설이었다. 평년보다 따뜻한 기온에 서해바다가 채 식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도 눈을 구경하겠다고 카페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데, 한참만에 눈치챈 사실은, 눈이 아직 채 지지 못한 은행잎 위에 쌓여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이고, 겨울이면 새하얀 눈인데, 올해는 가을이 차례를 넘기지 못한 사이 겨울이 와버려 가을과 겨울이 한 프레임에 공존하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상식들이, 내 몸에 익은 리듬이 깨져가고 있었다.

지구가 더워지고 있다는 사실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올해가 기록상 가장 더운 해이며, 작년도 기록상 가장 더웠던 해였던 것도, 기후 위기 전문가가 매년 맞는 여름이 앞으로 남은 여름 중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것이라 전망한 것까지도. 그런 사실을 접하고도 뭔가 실체 없는 도시 괴담처럼 와닿지 않았다. 한국의 4계절이 재정의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몇 해 전부터 지자체의 벚꽃 축제, 단풍 축제 등이 계속해서 예측을 빗나가 주인공 없는 축제가 되어 가고 있단 사실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내 일과는 상관없다는 듯 무관심하게 굴고 있었다.

남 일인 척 시침 뗐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매번 장을 볼 때마다 식재료 가격이 계속해서 오르던 것도, 겨울이면 아버지의 텃밭에서 배추를 뽑아 하던 김장을 배추가 더운 날씨에 제대로 자라지 못해 포기해 버린 일도, 역시나 날씨 탓이었다. 키위가 이제는 강원도에서 자란다. 모든 게 비정상적이다.

김장철, 벚꽃 철, 단풍철, 내가 사랑하던 그 모든 풍경들이 이제 곧 사라질 수도 있겠다. 내가 남 일로 미뤄두는 사이 내가 평생 동안 체득해온 모든 상식들은 ‘오답’이 되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누군가 나 대신 힘써주길 기다릴 수는 없겠다. 나의 ‘상식’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일의 시작을 ‘무관심 멈추기’부터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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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지 ‘따님이 기가 세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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