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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 (목)

무너져 내린 기업인의 꿈 '칩 메이드인 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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팻 겔싱어 인텔 CEO 전격퇴진‥투자자 불만 반영 된 듯

바이든 주도 반도체 전략에 기여‥트럼프 정부 출범 전 퇴진

파운드리·CPU 설계 등 분할 매각 추진 가능성 커져

최고의 반도체 전문가가 자신을 버린 회사에 칼을 갈고 돌아왔지만 남은 것은 자신의 몸에 남은 상처와 투자자의 분노였다. 이제는 전직이 된 팻 겔싱어 인텔 전 최고경영자(CEO) 얘기다. 겔싱어는 미국인들이 가족과 함께 연휴를 즐기는 추수감사절 휴일 기간에 전격적으로 사실상 경질을 통보받고 지난 1일(현지시간) 회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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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중앙)이 팻 겔싱어(왼쪽) 당시 인텔 CEO와 함께 애리조나의 인텔 공장에서 반도체 웨이퍼를 살펴보고 있다. 펜실베이니아주 출신인 바이든과 겔싱어는 미국 반도체 생산 부활을 위해 의기투합했지만 연이어 자리를 내놓게 됐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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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싱어는 경질 직전까지도 일론 머스크가 운영하는 인공지능(AI)업체인 xAI의 데이터센터를 둘러보며 인텔의 칩이 사용됐음을 강조했지만, 이사회의 매서운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추수감사절 연휴가 끝나자마자 들려온 겔싱어의 퇴진은 미국 언론, 기술 분야 기업에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연휴가 끝나는 시점에 이런 발표가 나오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텔 내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겔싱어는 해임과 사임이라는 선택지를 받은 후 사임을 택했다고 알려진다.

이번 겔싱어의 퇴출(?)은 2021년 그의 복귀 이후 이어져 온 인텔 중심의 미국 반도체 제조공정(파운드리) 회복에 대한 맹목적인 투자와 이로 인한 비용 부담을 우려해 온 투자자들의 심리가 고스란히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 취임을 앞두고 조 바이든 대통령과 찰떡궁합 행보를 보여온 겔싱어를 전략적으로 밀어낸 것일 수도 있다.

겔싱어 축출을 주도한 이는 프랭크 예리 인텔 이사회 의장이다. 2009년 인텔 이사회에 합류한 예리는 샌프란시스코 인근 UC버클리대 출신이지만 뉴욕에서 월가 투자자로 성장했다. 예리는 지난해 1월 공학자인 오마크 이쉬락 당시 이사회 의장을 대신해 이사회 의장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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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예리 인텔 이사회 의장. 투자은행 출신인 예리는 팻 겔싱어 CEO의 퇴진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진=인텔


예리가 인텔에 합류한 2009년은 겔싱어가 사내 라이벌이었던 숀 멀로니와의 경쟁에서 밀려 인텔을 떠났던 해다. 그리고 예리가 이사회 의장을 맡은 후 2년이 되기도 전에 겔싱어는 자리를 내놔야 했다.

겔싱어도 예리의 임무가 주가 부양에 있음을 짐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리의 이사회 의장 취임 관련 인텔 보도자료에서 겔싱어는 "주주 가치를 제고하는 데 있어 예리의 전문성, 기업 거버넌스에 대한 집중, 인텔에 대한 친숙함은 우리가 전략을 실행하는 데 있어 이사회와 회사 모두에게 강력한 자산이다"라고 말했다.

예리도 주주 가치 상승을 취임 일성으로 꼽았다. 그는 "우리의 전략을 잘 실행하고 주주들에게 가치를 제공하는 것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두 사람의 표현대로 주주 가치와 기업 거버넌스에 강점을 가진 예리는 겔싱어의 인텔 경영에 심각한 불만을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리가 취임할 당시 인텔 주가는 약 30달러 선이었다. 최근에는 20달러 초반에서 맴돌고 있다. 인텔 주가가 하락했지만, 영원한 라이벌이었던 AMD는 물론 인텔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던 엔비디아는 세계 반도체 업계의 중심으로 거듭나며 기업 가치에서 현격한 차이가 발생했다.

현재 인텔의 시가총액은 1000억달러다. 엔비디아의 3조달러와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다. AMD의 2300억달러와 비교해도 절반에도 못 미친다. 인텔의 매출은 2021년부터 2023년까지 30% 이상 추락했고 지난 10월에 발표된 분기 실적은 창업 후 가장 큰 166억달러의 적자였다. 미 정부는 반도체법(Chips Act)에 따라 인텔에 지급할 보조금을 85억달러에서 79억달러로 축소했다.

겔싱어의 은퇴를 알리는 인텔 보도자료에는 예리의 ‘예리한’ 언급이 포함됐다. 그는 "팻은 최첨단 반도체 제조에 투자해 공정 제조를 시작하고 활성화하는 한편, 회사 전반에 걸쳐 혁신을 추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고 전제했다. 하지만 "인텔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투자자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사회는 무엇보다도 제품 그룹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중심에 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은 겔싱어가 바이든 행정부의 ‘칩 메이드 인 아메리카’ 전략에 부응하기 위해 파운드리에 집중적으로 투자한 것이 실수였으며 오히려 인텔의 반도체 설계의 경쟁력을 강화해 엔비디아, AMD와 경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읽힌다.

대표적인 예가 인텔의 GPU인 가우디다. 겔싱어는 지난 6월 대만에서 열린 컴퓨텍스 행사에서 가우디가 엔비디아 GPU에 비해 저렴하면서도 성능이 우수하다고 했지만 이를 구입하겠다는 기업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인공지능 업계에서는 엔비디아 ‘블랙웰’ 확보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인텔코리아에서도 엔비디아 GPU에 비해 가우디가 우세하다고 알려온 인력들이 줄줄이 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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팻 겔싱어 전 인텔 CEO가 지난 6월 대만에서 열린 컴퓨텍스 행사에서 가우디 GPU를 들어 보이고 있다. 가우디는 엔비디아, AMD와의 경쟁에서 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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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은 겔싱어의 주도하에 오하이오, 애리조나 등에 대규모 투자와 정부 보조금을 동원해 파운드리 건설에 나섰다. 코로나19를 계기로 발생한 반도체 공급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인텔의 도전을 부추겼다. 그 결과가 대규모 보조금 지급을 규정한 반도체법이다.

인텔 스스로도 7나노 이후 신규 투자 중단으로 삼성전자와 TSMC에 밀려 정체된 미세공정 투자를 해야 할 필요성이 부각되던 때다. 겔싱어는 역시 펜실베이니아주 출신인 조 바이든 대통령과 협력해 보조금을 담은 반도체법 통과에 적극 앞장섰다.

삼성전자가 미국에 반도체 파운드리를 세우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겔싱어의 역할이 컸다. 보조금이 없었다면 미국에 파운드리를 건설할 요인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인텔이 자체적으로 신공정을 도입한 파운드리에서 제조한 CPU들은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연이어 발생한 발열 이슈와 오류 논란은 공정 자체에 대한 신뢰성은 물론 인텔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설계 능력까지 의심하게 했다.

자체 생산 물량만으로 막대한 투자를 한 파운드리 라인을 채울 수 없다면 외부 고객을 확보해야 한다. 문제는 신뢰성이다. 최신 CPU 생산을 대만 TSMC에 위탁한 인텔에 반도체 생산을 맡길 미국 기업을 찾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반도체 업계의 진단이다. 대표적인 예가 구글, 퀄컴, 애플이다. 인텔이 아마존의 AI칩 생산을 수주하는 성과도 있었지만 이것만으로는 추락을 막을 수 없었다. 오히려 지난 10월에는 엔비디아가 인텔을 대신해 다우존스 지수에 편입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사설을 통해 "정부 보조금이 인텔 CEO의 운명을 구하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정부의 지원에도 성과를 내지 못한 기업에 대한 투자자들의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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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6월 2일 타이베이 국립대만대 종합체육관에서 한 '컴퓨텍스 2024' 기조연설에서 올 하반기 출시할 AI가속기 '블랙웰'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예리가 내린 진단은 간단하다. 효율성과 수익성의 개선이다. 예리는 인텔이 제품을 단순화하고 제조 및 파운드리 역량을 진전시키는 동시에 운영 비용과 자본 투자를 최적화하는 등 우선순위에 따라 긴급하게 대응해 나갈 것이며 더 간결하고 단순하며 민첩한 인텔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는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가 1998년 애플 CEO로 복귀해 내린 진단과 유사하다.

관심은 다음 인텔 CEO가 누가 될 것인지와 파운드리와 CPU 사업의 매각 여부다. 겔싱어는 파운드리 사업의 완전한 분사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지만 월가의 불만이 확연해진 만큼 파운드리 분사는 급격히 이뤄질 수도 있다.

인텔을 조각내 매각하려는 행동주의 펀드의 개입도 예상해 볼 수 있다. 분할 매각에 부정적이던 겔싱어가 사라진 만큼 인텔 이사회는 주가를 올리기 위해 매각 등 조치에 신속하게 나설 것이 분명하다는 게 블룸버그 등 미 매체들의 판단이다. 인텔 인수 후보로 거론되던 퀄컴, 브로드컴 등이 인텔 인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으로 돌아선 것으로 전해지는 것도 매각이 쉽지 않음을 알려주는 예다. 반도체 업계는 트럼프 1기 시절에도 미 정부가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 시도를 막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보조금 지급에 부정적인 트럼프 정부의 등장은 인텔의 운명을 쥐락펴락할 수도 있는 요인이다. 겔싱어와 함께 반도체법을 구상한 바이든 대통령 역시 백악관에서 나와야 하는 상황에서 리스크를 감수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미국 정부의 보조금 지급이 파운드리 분사나 매각을 어렵게 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인텔이 파운드리 자회사에 대한 지분의 과반수를 포기할 경우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조항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외부 투자가 이뤄질 경우에 상무부의 승인을 받아야 할 수도 있다. 인텔 경영진과 다음 트럼프 정부와의 관계 형성도 중요하다.

다만 인텔이 CEO 자리를 채우는 건 쉽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인텔은 2021년에도 애플의 반도체 설계 책임자인 조니 스루지를 CEO로 영입하려다 실패하고 겔싱어를 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애플이 이번에도 스루지 영입을 위해 노력하겠지만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는 가라앉고 있는 인텔을 책임지겠다는 인물을 찾기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스테이시 라스곤 샌포드 C 번스타인 애널리스트는 "인텔 CEO 자리를 채우기도 어렵겠지만 CEO를 맡을 이의 앞에는 힘든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백종민 기자 cinqang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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