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3월2일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미국 방문 후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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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준 | 아무나유니온 대표
지난달 스스로 불쑥 떠난 그를 추모한다. 1인당 평균 국민소득 두배는 족히 넘는 억대 연봉을 받는 중견기업의 40대 중반 생산직 노동자였다. 왜 세상을 등졌을까. 지인들과 그를 추모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무의미의 세계’에 대해 들었다. 저마다 도박, 투기로 빚에 빠진 지인들 기억을 꺼냈다. 그가 떠난 뒤 매년 연봉은 올라도 컨베이어에 묶인 노동은 그대로인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무의미의 세계’로 미끄러진 사람들을 자꾸 떠올린다.
생존은 생명체에 달라붙은 운명이다. 그래서 원치 않아도 수행해야 하는 생존을 위한 노동이 즐비하다. 하지만 인간은 생존 자체를 넘어선 의미를 붙잡으려 애쓴다. 산업화 시대에 국가는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든가 조국의 유일한 살길이라는 수출 경제의 사명을 담아 ‘수출의 역군’이라는 의미를 제시했다. 국가가 뭐라든 이미 사람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노동에 기꺼이 뛰어들었다. 그렇다고 노예 같은 노동을 마냥 견딜 수 있을까. 세상의 만물을 만드는 ‘위대한 노동’이라는 의미가 등장하고 ‘세계를 바꾸는 노동계급의 운동’이 솟아오를 때 세상은 출렁였다.
하지만 외환위기와 함께 실업의 공포를 마주한 우리는 생존 그 자체로 후퇴했다. 남은 것은 생존이고 실리였다. 임금이 오르고 또 올라 중산층의 반열, 국민소득 상위 10%에 속한 노동자 집단도 늘었다. ‘킹산직’이라는 이름도 생겼다. 오른 연봉만큼 삶의 의미도 성숙했을까. 단순 반복 노동에 대해 높은 연봉을 받는 것은 일종의 보상이고 돈 버는 재미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연대가 사라진 각자도생의 세계에서 특정 집단만의 경제적 지위 향상이 삶에 충분한 의미를 부여해줬을 것 같지는 않다.
40년 넘게 ‘사회’를 부정해온 사람들이 있다. “사회 따위는 없다”(There is no such thing as society)고 선언했던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1980년대에 세계적 보수혁명을 이끌었다. 이들은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에 의존하는 ‘복지병’을 고쳐야 한다며 사회 자체를 부인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경쟁사회, 위험사회, 불안사회, 혐오사회 등 사회 앞에 부정적 수식어를 수없이 붙일 수 있다. 그만큼 많은 일이 벌어지는 관계의 앙상블이 사회다. 그러나 독립적 생존력이 없는 아이에서부터 노인까지 보살피며 진화한 인류 생존 비법이 ‘돌봄이 본질인 사회’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앞세운 사람들은 오래도록 그런 사회를 제거하려 했다.
사회를 부정하는 것은 낡은 보수 이데올로기만은 아니다. 명문대 엔번방 사건은 충격이었다. 사건의 주범 명문대생의 지능지수는 높을지 모르나 사회지능이 얼마나 끔찍한 수준인가를 보여주었다. 사회지능은 서로 연결되어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고 향상되는 인간의 역량이다. 학계에서는 ‘사회적 뇌 가설’을 통해 사회적 관계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온라인의 초연결은 인류에게 도대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걸까.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에 접속은 늘고 오프라인의 인간과 접촉은 약해지며 인공지능에 대한 열광이 사회지능의 중요성을 묻어버릴 기세다.
정치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왜 부자 우파를 지지하냐고 묻는다. 빈곤 때문인가. 수많은 연구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돈이 있든 없든 서로 접촉하고 보살피며 정을 나누는 사회적 경험이 없으면 분노와 혐오에 약해진다. 중요한 것은 다정한 사회를 경험할 기회다. 사회학자들은 사회를 지탱하는 축으로 ‘제3의 공간’에 대해 주목했다. 집이나 직장도 아닌, 다양한 정보와 의견과 정을 나누던 동네 구멍가게와 이발소와 같은 장소다. 인공지능 시대에 ‘제3의 공간’은 개발로 사라진 과거 공간에 대한 향수에 불과할까.
산업 현장, 민주주의를 품은 광장도 변했다. 산업은 컨베이어가 아닌 플랫폼에 접속한 정보와 상품의 생산과 이동으로 바뀌고, 광장은 서로에 대한 혐오와 적대의 시위로 물든다. 개인을 앞세운 자유주의 질서는 우파 트럼프를 통해 흔들리고 국가의 책임을 강조해온 좌파도 무기력하다. 요동치는 세계는 시민이 풀기에는 너무 벅찬 숙제일까. 하지만 오늘도 우리는 접속을 넘어 접촉하고, 이익을 넘어 의미를 발견한다. 상업적 커뮤니티가 많고 더러는 위험한 커뮤니티도 있지만, 다채로운 커뮤니티 속에서 사회지능을 새로운 단계로 이끌 ‘제4의 공간’을 발견하고 개발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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