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사마 야요이·이불·이미래·김인순… 연말 화두는 ‘여성들의 서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이불의 1999년작 ‘아마릴리스’(흰색 설치물)가 전시됐다. 여성의 신체와 기계가 불완전한 형태로 결합한 ‘사이보그’ 연작을 내놨던 이불은 이 작품에서 인간과 비인간, 여성과 남성, 식물과 동물이 한 몸에 엉켜 있는 복합유기체를 구현했다. /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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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미술계엔 거센 여풍(女風)이 불었다. 올해 국내 국공립 미술관에서 열린 주요 전시의 화두는 ‘여성’. 상반기 호암미술관은 동아시아 불교미술을 여성 관점에서 조명하는 세계 첫 전시로 호평받았고,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여성의 규방 취미 정도로 취급받았던 자수를 현대미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특별전으로 관람객을 끌어모았다.
연말 전시장에서도 주체적인 여성들의 서사가 돋보인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접속하는 몸-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은 ‘몸’이라는 관점에서 1960년대 이후 아시아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조망한다. 아시아 11국 여성 작가 60여 명(팀)의 작품 130여 점을 통해 신체가 갖는 소통과 접속의 가치에 주목했다. 한국 1세대 여성 사진작가 박영숙부터 일본 작가 구사마 야요이, 설치미술가 이불, 필리핀 독재에 저항한 여성 예술가 그룹 카시불란, 한국 작가 최초로 테이트모던 터바인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이미래까지 총출동했다.
홍이현숙, '석광사 근방'. /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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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그린 몸에는 아시아의 복잡한 근현대사 속에서 식민, 전쟁, 이주, 가부장제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삶의 기억이 각인돼 있다. 김혜순의 시 ‘마녀 화형식’을 해석한 박영숙의 사진 ‘마녀’는 사회적 억압과 부조리에 문제를 제기하고, 윤석남의 회화 ‘엄마의 식사 준비’는 여성의 가사 노동 문제를 보여준다. 성과 죽음, 쾌락과 고통 같은 금기도 정면으로 다룬다. ‘땡땡이 호박’으로 유명한 구사마 야요이의 1967년 퍼포먼스 영상은 그가 왜 무수한 점을 찍는지 짐작하게 한다. 자신의 신체가 점으로 뒤덮이는 환상을 본 구사마는 강박적으로 점을 찍고 그리기를 반복하다가 자신의 몸, 나무, 바위에까지 점을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이 점으로 뒤덮인 그의 세계는 인간과 자연,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아라마이아니, '마음의 생식능력을 막지 마시오'. /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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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작가 아라마이아니가 수하르토 정부의 산아 제한 정책에 반발해 만든 ‘마음의 생식 능력을 막지 마시오’, 미츠코 타베의 ‘인공태반’ 등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이 대거 나왔다. 상당수 작품이 이번에 국내 처음 소개됐다. 내년 3월 3일까지. 관람료 5000원.
구보타 시게코, '뒤샹피아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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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는 여성주의 작가 김인순(83)의 작품을 통해 한국 여성 미술의 궤적을 살피는 전시 ‘일어서는 삶’이 열리고 있다. 김인순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의 현실과 사회를 변화시키고 생명을 창조하는 여성의 힘과 건강한 아름다움을 작품으로 표현해왔다. 2020년 작가가 기증한 본인 작품 96점 중 대표작 20점과 공동창작 그림, 아카이브 등이 전시됐다. 내년 2월 23일까지. 무료.
김인순, '태몽 09-5'(2009).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194cm. /서울시립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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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미술을 조명하는 연구서도 최근 연달아 출간됐다. 김홍희 전 시립미술관장은 여성 미술가 44인의 작업을 화두별로 묶은 ‘페미니즘 미술 읽기’를 펴냈고, 여성 연구자들로 구성된 현대미술포럼은 한국 근현대 여성 미술가 105명을 조명하는 책 ‘그들도 있었다’를 출간했다. 미술사학자 김현주 전 추계예대 교수는 “1980년대에서 2000년대로 갈수록 한국 페미니즘 미술은 사회적 범주로서 동질성을 지닌 여성에 대한 정의를 벗어나 특정한 조건을 가진 구체적인 여성들의 삶의 서사를 드러내고 발굴, 조사, 연구하는 방향을 취하고 있다”며 “기존 예술의 패러다임에 도전하고 의식의 지평을 열어준 여성 미술가들의 다양하고 복잡한 발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했다.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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