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작가가 1일 베이징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해질 무렵> 북 토크 행사에서 자신의 문학세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박은하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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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겉모양이 선진화돼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방에 펑크 난 곳을 때운 것 같은 ‘구멍마개’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개를 열고 구멍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1일 중국 베이징 한국문화원 강당을 가득 메운 150명가량의 관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 출판사 시론이 마련한 황석영 작가(81)의 강연을 들으러 온 이들이다.
황 작가는 “사회적 변화가 있을 때마다 가장 큰 타격을 받는 이들은 청년들”이라며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부른 외환위기를 겪고 2000년대 들어 세계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은 나라가 돼 버린 것을 예로 들었다. 황 작가는 “근대는 가 보지 않았던 길을 가 보는 것이며 따라서 전 세계의 근대화는 모두 왜곡된 근대화일 수밖에 없다”며 “<해질 무렵>은 청년의 시각으로 마개를 열고 구멍을 들여다본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2015년 출간된 <해질 무렵>은 서울 달동네 출신의 성공한 60대 건축가와 서른을 앞둔 가난한 연극인 지망생의 이야기를 다룬 중편 소설이다. 황 작가는 소설의 모티브가 된 시나리오 작가 고 최고은씨의 죽음이 예술인 복지법 제정으로 이어진 일도 소개했다.
황 작가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피눈물 나는 과정이었지만 막상 민주주의란 것은 대단히 위태로운 것”이라며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야 하니 우왕좌왕하기도 하고 때로는 후퇴도 하면서 꼭 술 취한 사람의 걸음걸이처럼 간다”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좌중의 웃음이 터졌다. 황 작가는 “그래도 감옥에 갔던 시절들과 비교하면 세상이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아지기는 했다”고 전했다.
황 작가는 “베이징에 오기 전 참석한 포럼에서 들은 ‘문학의 원천은 인민의 삶’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중국에 오기를 잘했다”며 “공감과 연대가 21세기 예술의 기본”이라고 말했다.
1일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황석영 작가의 북 토크 행사에 참여한 청중 가운데는 젊은층이 많았다. /박은하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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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과 맨부커상을 비롯해 국제 문학상 최종 문턱에서 몇 차례 떨어진 일이 언급되자 황 작가는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가 아니라 <파우스트>로 작품 인생을 마무리했다”며 “마지막까지 자신을 내던지며 더 나은 작품을 쓰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고 말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황 작가는 출판사 시론의 초청으로 9박10일 일정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지난달 24~26일 항저우에서 열린 량주포럼에 참석했으며, 지난달 27일 대외경제무역대학에서도 북 토크 행사에 참석했다. 황 작가가 중국에서 대중독자와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황 작가는 문화원 강연을 앞두고 한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중국에서의 뒤늦은 인기 비결에 대해 “모르겠다”고 말했다.
황 작가는 중국과 접점이 많은 작가이다. 1943년 중국 지린성 창춘에서 태어났다. <바리데기> <심청> <철도원 삼대> 등 많은 그의 작품들이 중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 주목받지는 못했다. 2005년 <오래된 정원>이 중국에 출간됐지만 별다른 반향이 없었다. 한국전쟁을 다룬 <손님>은 소재의 민감성 때문에 소개되기 어려웠다. 동아시아보다는 오히려 유럽에서 주목하던 작가였다.
도서·영화 등 문화 플랫폼 더우반의 주간 소설 분야 지수. 황석영 작가의 <해질 무렵>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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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가 가져온 상흔을 다룬 그의 작품세계가 뒤늦게 발견됐다고 보고 있다. 펑파이신문은 <해질 무렵> 출간 직후 평론에서 “황석영은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의 대가는 인간성의 상실과 전통의 죽음이라고 본 냉철한 관찰자”라고 평했다. 대외경제무역대학 강연에서 한 청중은 ‘고향을 잃어버린 젊은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는 취지로 질문했고, 황 작가는 “당신이 서 있고 마음을 주는 곳을 고향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황 작가는 중국의 출판 계약과 국제행사 진행 역량 등이 상당하다며 높이 평가했다. 자신도 모옌·위화·류전원·루쉰 등 중국 근현대 작가들의 책을 보고 교류하며 영향을 받았다며, 동아시아 문학이 함께 세계 문학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1970~1980년대 군사정권이 금지했던 루쉰의 책은 일본어판으로 몰래 봤다”며 “중국이 더욱 선진화해 검열 제도에도 변화가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베이징 | 박은하 특파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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