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딸을 둔 한 아버지가 지난 9월 서울 한 4년제 사립대에서 열린 대규모 취업박람회에 참여해 한 대기업 부스에 앉아 상담을 받았다. 사진과 기사는 관련 없음. 송봉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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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 한 4년제 사립대에서 열린 대규모 취업박람회에서 희끗희끗한 흰머리의 중년 남성이 한 대기업 부스에서 상담을 받았다. 지방대 졸업을 앞둔 딸을 둔 아버지였다. 그는 “딸이 서울에서 취업하려고 준비 중인데 요즘 채용 트렌드를 확인해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싶어 물어보려고 왔다”고 말했다.
헬리콥터 부모들이 성인 자녀의 직장 등 사회 생활에 개입하는 건 대부분 자녀 대학 시절부터 학점 관리나 취업 준비 등에 관여해왔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서울 내 4년제 대학에서 경영학을 가르치는 강사 조모(33)씨는 지난 7월 1학기 성적처리 마감을 앞두고 한 수강생 어머니로부터 “아들의 F학점을 철회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조씨는 “같은 질병 확인서를 네 차례 냈기 때문에 세 번은 결석으로 보고 F학점을 준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어머니는 “내가 봤는데 애가 진짜 아팠다. 대학에 갑질한다고 신고하겠다”고 막무가내였다고 한다. 조씨는 “과거엔 강의계획서에 교수 휴대전화 번호를 적는 게 필수였지만, 부모의 항의 전화가 잦다 보니 최근엔 자율적으로 정하는 추세”라고 했다. 서울 한 사립대 의과대학 교수 이모씨는 “지각한 학생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태연히 ‘엄마가 안 깨워줘서 늦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중년의 아버지들이 대학생 자녀 과제를 대신 하면서 진땀을 흘리는 일도 많다. 대학교 1학년 딸을 둔 한 정부부처 서기관은 “교양과목 책을 대신 읽고 요약·정리하는 데 최소 5시간은 필요해 주말에 쉬는 게 쉬는 게 아니다”고 토로했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과거엔 치맛바람, 헬리콥터 맘 같은 단어에서 볼 수 있듯 주로 엄마가 양육의 주체 역할을 했지만, 과잉 양육 현상이 확산하며 그 주체가 아버지로까지 범위가 넓어졌다”고 분석했다.
지난 9월 서울 정부청사에서 만난 의대생 부모 60대 정모씨는 “부모가 자녀의 꿈을 지키는 건 당연하다. 자녀가 성인이란 이유로 곱지 않게 바라봐 답답하다”고 말했다. 정씨는 이날 1시간 동안 의대증원 반대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이찬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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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부모는 자녀의 이익을 위해 집단행동도 마다치 않는다. 지난 2월 정부가 의대 정원을 늘리겠다는 방침을 내놓은 뒤 전국 의대생과 전공의 부모 3900여 명이 모인 전국의대학부모연합은 8월부터 11월 수능 당일까지 정부 서울청사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4명씩 2조로 매일 2시간씩 정부 정책에 반대했다. 의대생 자녀를 둔 60대 정모씨는 “아들의 꿈이 무너져 마음이 아프다”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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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월급·진로 관리 다 부모에 의존하는 2030
정근영 디자이너 |
중앙일보가 2030대 자녀 5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성인 이후 부모로부터 받거나 요청한 도움(경제적 지원 제외)’을 물었더니 44%(중복응답 포함)가 ‘재무 관리’를 꼽았다. 5060대 부모 50명을 상대로 성인 ‘성인 자녀에게 준 도움이 어떤 것인지’를 묻자 ‘보험‧은행‧통신 등 가입’(66%, 중복응답 포함)이 1위로 꼽혔다. 법적으로 미성년 연령이 지나면 본인이 직접 해야 하는 돈 관리나 행정 처리 등을 여전히 부모에게 의존하는 셈이다.
지난해 3월 취업한 박민석(29)씨도 아버지가 휴가를 내고 집 근처 은행 서너 곳을 돈 뒤 1년 만기 적금, 청년도약계좌 개설, 상장지수펀드(ETF) 투자 등을 알아봐 줘 이를 따랐다. 박씨는 “돈 관리를 어떻게 할지 막막했는데 이렇게 도와주셔서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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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은 이외에 ‘독립 뒤 가사 도움’(34%‧17명), 등‧하교, 출‧퇴근 때 승용차로 태워주는 ‘라이딩’(24%‧12명), ‘취업 등 정보 검색’(16%‧8명) 등의 도움을 받는다고 답했다. 부모들의 경우 취업·결혼 등 관련 ‘정보 검색’을 도와줬다는 답변이 42%(21명)로 2위였다.
성인 초반기(Young Adult)에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하고 의존하기 시작하면 전 생애에 걸쳐 성숙한 인간이 되지 못하는 심리적 발달 장애, 유아화(乳兒化)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했다. 김현수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교수는 “어릴 때부터 주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면 부모가 원하는 삶을 대신 살게 되고 결국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잃는다”고 지적했다.
이보람·김서원·이찬규 기자 lee.boram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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