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총액 늘었는데 한국 증시 부진한 이유는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자본’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무려 ‘주의’라는 단어가 따라붙었을까. 자본은 영리 활동에 필요한 ‘사업 밑천’에 다름 아닌데, 영리 활동은 대체로 기업이 수행한다. 기업이 최초에 사업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은 외부로부터의 차입과 주주의 출자로 이뤄진다. 기업에 자본을 공급하는 주체는 채권자와 주주인 셈인데, 채권자는 기업에 대해 제한적 이해관계만을 가진다. 채권자가 기업에 대해 가지는 이해는 정해진 이자와 원금을 수취하는 데 한정되기 때문이다. 기업이 크게 흥한다고 해서 채권자의 수입이 더 늘어나는 것은 아니고, 기업이 어려워지더라도 이자와 원금을 지급할 정도만 되면 채권자가 손해를 보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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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총 늘고 주가지수 올랐지만
한국 증시, 양자 간 괴리 확대
기업 수익성 개선되지 않았는데
발행 주식 수만 늘며 가치 희석
미국 기업, 자사주 소각 적극적
중국은 신규 상장 일시적 금지
반면 주주는 기업의 흥망성쇠가 곧바로 자신이 투자한 자본의 증식 여부와 결부된다. 기업에 자본을 공급한다는 점에서는 채권자와 주주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주주의 이해관계는 기업 활동의 궁극적 성패와 직결돼 있어 주주는 기업의 주인이라고 불리곤 한다. 주식은 자금을 투자함으로써 기업의 소유주가 된 이들에게 부여되는 재산권이다.
주식 시장은 기업에 대한 자금 공급처로 기능함으로써 실물 경제에 기여하지만, 종종 주식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 즉 유상증자는 투자자에게 악재로 받아들여진다. 3가지 점에서 그렇다. 먼저 주식의 신규 발행을 통한 자본 조달은 기존 주주에게 부담으로 작용한다. 투자 기업에 대해 동일한 지배권(지분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증자에 참여하면서 추가로 자금을 더 투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늘어난 주식 수를 상쇄할 수 있을 정도로 기업 이익이 증가하지 않으면 자본 효율성이 저하되기 때문이다. 자본 효율성을 측정하는 대표적인 지표는 자기자본이익률(ROE)인데, ROE는 당기순이익을 자기자본으로 나눈 값이다. 유상증자는 분모인 자기자본을 늘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당기순이익이 충분히 늘어나지 않으면 ROE는 하락하게 된다. 셋째, 모든 자산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되는데, 유상증자는 주식의 신규 공급을 늘리는 요인이다. 공급이 늘어나면 가격은 하락 압박을 받게 된다.
시총 66% 늘 때 코스피 23% 상승
과도한 주식 공급은 장기화하고 있는 한국 증시의 성과 부진을 설명할 수 있는 주요한 요인이다. 최근 10년간 코스피는 23% 상승했지만, 시가총액은 66%나 증가했다. 최근 5년을 살펴보더라도 코스피 상승률은 17%, 시가총액 증가율은 44%였다. 코스닥 시장은 양자 간의 괴리가 더 큰데, 최근 10년 코스닥 상승률은 24%, 시가총액 증가율은 139%, 최근 5년 코스닥 상승률과 시가총액 증가율은 각각 7%와 48%를 기록하고 있다.
박경민 기자 |
한국 증시의 주가지수는 시가총액의 증감을 반영해 결정되는데, 왜 이렇게 양자 간의 괴리가 클까. 주가가 상승해서 시가총액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주식이 시장에 많이 공급됐기 때문이다. 기업공개(IPO) 등을 통한 신규상장과 기존 상장기업의 신주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유상증자) 등은 모두 물리적인 주식 수 증가로 귀결된다. 특히 최근에는 전환사채(CB) 등과 같은 주식 연계증권을 활용한 자본 확충도 늘어나고 있다.
기업이 주식 발행을 통해 조달한 자금을 활용해 기업 가치를 높이면 장기 투자를 하는 주주는 그 과실을 누릴 수 있다. 그렇지만 최근 상당수 상장사는 차입금 상환이나 운영자금 마련을 목적으로 유상증자를 실시하고 있다. 차입금 상환은 자본의 구성만을 바꾸는 행위이고, 운영자금은 일상적인 기업 활동에서 소진되는 돈이기 때문에 기업의 본질적인 수익성 개선과는 거리가 있다. 수익성은 개선되지 않는데 발행주식 수는 늘어나니 주당 가치가 희석(dilution)된다. 당연히 주가는 하락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 사정은 어떨까. 미국 S&P500지수는 최근 10년간 190% 상승했고, 시가총액은 179% 늘어났다. 한국과는 정반대다. 주가지수 상승률보다 시가총액 증가율이 더 낮다. 유상증자를 통해 주식 수를 늘린 것이 아니라 자사주 소각을 통해 오히려 주식 수를 줄였기 때문이다.
애플, 지속적 자사주 소각에 ROE 157%
세계에서 시가총액이 가장 큰 애플이 대표적인데, 지속적으로 자사주 소각을 하면서 10년 전 234억주에 달했던 유통주식 수가 최근에는 151억주로 줄었다. 자사주 소각으로 자기자본도 1115억 달러에서 549억 달러로 감소했다. ROE 계산에 분모로 들어가는 자기자본이 줄어들면서 2024년 9월 말 결산 기준 애플의 ROE는 157%라는 초현실적인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다른 시장도 대체로 비슷한데 최근 10년간 나스닥 지수 상승률은 297%, 시가총액 증가율은 324%다. 신규 자금 조달이 필요한 스타트업이 상장되는 시장이기 때문에 시가총액 증가율이 주가지수 상승률을 상회하지만, 한국 증시처럼 괴리가 크지는 않다. 도쿄증권거래소도 최근 10년간 주가지수 상승률 90%, 시가총액 증가율 84%를 기록하고 있다. 역시 자사주 소각 등을 통한 총량적 공급 관리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박경민 기자 |
한국보다 주식 공급이 더 많이 이뤄진 시장이 있다. 중국 본토의 상하이 증시다. 최근 10년간 상하이종합지수가 22% 상승하는 동안 시가총액은 무려 154%나 늘어났다. 최근에는 정부의 공격적인 경기 부양책으로 중국 증시가 반짝 반등세를 나타냈지만, 중국 증시의 장기 성과가 한국 증시만큼이나 부진한 이유도 과도한 공급 물량 부담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에서는 ‘높은 경제 성장률과 부진한 주가’라는 어색한 조합이 자주 나타난다. 성장률이 높은 경제에서는 기업도 돈을 벌 기회가 많은데, 이런 점은 기업의 투자 수요 증대로 귀결된다. 기업은 투자를 늘리려 유상 증자와 IPO를 통해 주식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한다. 이런 과정은 기업의 자금 조달 창구라는 주식 시장 본연의 기능이 잘 작동한 결과이지만, 만성적인 공급 물량 확대는 주가를 끌어내리는 힘으로 작용한다. 어떤 자산 가격이건 과도한 공급에는 버틸 수 있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1980~90년대의 한국 증시는 주가가 상승하기만 하면 포스코와 한국전력, KT 등 국민주 공모라는 이름의 대규모 주식 공급이 있었고, 이렇게 늘어난 물량이 주식 시장을 압박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1980~90년대의 한국 경제는 요즘보다 훨씬 활력이 넘쳤지만, 주식 시장은 ‘3저 호황’을 등에 업은 1985~88년의 강세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기에서 장기 박스권에 갇혀 있었다. 과도한 주식 공급은 불투명한 지배구조와 더불어 신흥국에서 경제 성장과 주가의 괴리를 불러오는 주된 요인이다. 최근 중국 정부가 주식의 신규 상장을 일시적으로 금지한 조치도 주식 공급 억제를 통해 주가 부양을 도모한 것으로 봐야 한다.
코스닥 상장 종목, 코스피 2배 넘어
박경민 기자 |
한국은 코스닥 시장이 문제다. 코스닥 시장의 공급 관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무엇보다 상장 종목 수가 너무 많다. 코스닥 상장 종목은 1754개로, 코스피 841개의 2배가 넘는다. 2022년 4월 도쿄증권거래소의 그로스(Growth) 지수에 편입되면서 없어졌지만, 코스닥과 비슷한 성격이었던 일본 자스닥 시장의 상장 종목 수가 680~700개 수준에서 유지됐고, 대만의 성장주로 구성된 그레타이지수의 종목 수가 828개라는 점을 감안하면 코스닥의 상장 종목 수는 너무 많다.
신생 기업에 대한 모험 자본 공급이라는 코스닥 시장 설립 목표가 잘 구현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투자자 간 이해관계의 비대칭성이 너무 심하다. IPO 이전 신생기업에 초기 투자를 하곤 하는 벤처캐피털은 전문적 투자자다. 신생 기업의 IPO는 이들 전문 투자자가 투자 자금을 회수하는 기회(exit)로 활용되곤 한다. 코스닥은 외국인이나 기관투자자보다 개인투자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시장이다. 소위 개미투자자는 IPO 등을 통해 벤처기업에 자금을 공급했지만, 코스닥 시장은 번번이 이들의 기대를 배신했다. 새로이 발행되는 주식과 벤처캐피털 등 초기 투자자의 매도 등으로 인한 만성적인 공급 우위 환경이 줄곧 코스닥 시장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정보 불균형에 코스닥 떠나는 기업도
또한 코스닥 시장은 상장 종목 수가 너무 많다 보니, 정보의 불균형이 심하다. 1700여개의 상장 종목 중에서 증권사의 분석보고서가 나오는 종목 수는 100개 남짓에 불과하다. 극심한 정보 불균형은 불공정 거래가 발생할 개연성을 높이고, 이는 시장의 평판도 저하로 귀결되고 있다. 성공한 기업이 코스닥시장을 떠나는 이유다. 네이버와 셀트리온에 이어 최근에는 에코프로비엠도 코스닥을 떠나 코스피 이전 상장을 계획 중에 있다. 차고에서 설립된 후 나스닥 IPO를 통해 상장한 미국 주요 기술주가 나스닥을 떠나 뉴욕증권거래소로 옮겨갔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기업이 주식 시장에서 활발히 자금을 조달하고, 이 자금을 잘 활용해 성장을 도모하는 것은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다. 그렇지만 미국을 제외한 글로벌 경제 전반은 완연한 저성장의 길을 걷고 있다. 기업이 조달한 자금을 효율적으로 증식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총량적인 주식의 공급 관리에 성공하면서 자본 효율성을 유지하는 시장은 흥하고, 과도한 주식공급이 시장을 압박하는 시장은 쇠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아닐 수 없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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