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전라북도 전주시의 한 도로변에 고 강태완씨를 추모하는 노동당 전북도당의 펼침막이 걸려 있다. 김사강 이주와인권연구소 연구위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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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들 억울한 죽음, 에이치알이앤아이(HR E&I)는 책임지고 사과하라!’
엄마의 울부짖음을 새긴 펼침막이 걸렸다.
26년을 한국에서 이주아동으로 살다 중대산업재해로 사망한 강태완(몽골명 타이반·32·한겨레 연재 ‘호준과 호이준 사이에서’ 주인공)씨를 추모하고 회사의 사과를 요구하는 펼침막들이 28일부터 일제히 걸리기 시작했다. “슬픔이 분노로 바뀌었다”는 탄식과 “생명을 존중하고 책임을 다하라”는 촉구의 문장들이 그가 일했던 특장차 생산기업 에이치알이앤아이(전북 김제시 만경읍 만경공단) 앞에서 팽팽했다. 이주인권단체와 노동시민사회단체, 전국의 개인들까지 이름을 올린 펼침막 120여개가 29일까지 공단 입구뿐 아니라 김제·전주 시내 일대와 태완씨의 주검이 안치된 익산 원광대병원 주변에 설치된다. 그중엔 사망 뒤 20일이 지나도록 아들의 빈소도 차리지 못한 어머니 이은혜(몽골명 엥흐자르갈·62)씨의 것도 있었다.
지난 14일 태완씨의 어머니와 단체들이 고용노동부 전주지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회사의 사과를 요구했지만 사쪽은 여전히 응하지 않고 있다. 회사는 20일 ‘사과’ 대신 “유감”과 “애도”란 표현을 쓴 글을 회사 누리집에 올렸다가 어머니가 반발하자 내리기도 했다. 유족이 이튿날 ‘공개 사과문 게시와 합의서에 사과 명시, 재발방지 대책 마련에 유족 대리인 참여 보장 등’의 요구 사항을 회사 대표에게 보냈으나 아무런 답이 없는 상태다. 사실상 ‘사과 거부’라고 유족은 받아들이고 있다.(입장을 묻는 한겨레의 질문에도 사쪽은 답하지 않았다.) 지난해 8월 부산의 아파트 신축 공사 현장에서 창호 보수 중이던 고 강보경씨가 추락·사망한 이후 건설사 디엘이앤씨(DL E&C)는 일간신문 1면에 사과문을 실은 바 있다.
현재 회사는 태완씨의 죽음을 그의 잘못으로 돌리고 있다. 에이치알이앤아이는 고용노동부에 제출한 ‘산업재해조사표’(송재봉 민주당 의원실 확보)에서 재해발생원인을 “(고인이) 리모컨 조작으로 주행체를 방향 전환 또는 정차시키지 않고 몸으로 막음”이라고 기재했다. 반면 사고 위험이 상존해 있었다는 정황들도 확인되고 있다.
지난 8일 태완씨의 사망은 국책사업으로 개발 중이던 텔레핸들러(고소작업차와 지게차의 기능 결합) 차량 테스트 과정에서 발생했다. 당시 사고 차량은 개발 단계가 50%에도 이르지 못한 상태였고, 브레이크 기능도 장착돼 있지 않았다. 언제든 예기치 않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차량을 테스트하면서도 회사는 공장 출입구에서 시작되는 경사를 방치했다. 브레이크도 없이 경사를 만난 10t 차량은 속도가 빨라지며 태완씨를 밀어붙였다. 회사는 출입구로부터 10여m 맞은편에 야적된 중장비들도 이동 배치하지 않았다. 테스트 차량에 밀려난 태완씨는 불과 대여섯 걸음 만에 야적 장비들 사이에 끼었다. 중대재해처벌법 위반은 피해자의 실수 여부가 아니라 재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업주가 안전조처와 주의의무를 다했느냐에 따라 판가름된다.
태완씨가 기숙사에서 사용하던 컴퓨터에선 부서 ‘주간 업무보고’ 자료들이 발견됐다. 텔레핸들러의 “통신 단락 현상 발생”이란 문구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제어 시 신호가 끊겼을 경우에 대비해서 긴급정지 기능 추가”란 문장도 있다. 둥글게 회전했어야 할 차량이 제대로 방향을 틀지 못한 채 대각선으로 직진한 이유가 차량과 리모콘 사이 신호 전달 체계의 문제였을 가능성도 수사로 확인돼야 할 부분이다.
유족도 시위를 시작한다. 다음 달 2일 아침부터 태완씨 어머니와 그의 체류자격 취득을 도와온 이주인권단체 활동가들이 회사 앞에서 팻말시위에 나선다.
5일엔 태완씨가 안치된 원광대병원 인근에서 추모제를 진행한다. 전국에서 모인 시민들이 추모제 직전 회사 앞에서 항의 집회도 연다.
힘을 보태는 목소리들도 확산되고 있다.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대표는 지난 24일 태완씨 어머니를 찾아와 “용균이도 처음엔 자기 잘못으로 죽었다고 회사가 말했다. 해결될 때까지 절대 흔들리면 안 된다”며 손을 잡았다. 김용균재단과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비정규노동자쉼터 꿀잠 등 산재 피해자들을 도와온 단체들은 최근 모임을 갖고 유족 지원 방안 등을 논의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태완씨 소식을 에스엔에스(SNS)로 계속 알리고 있다. 현재 고공농성 중인 한국옵티칼하이테크(경북 구미시) 해고 노동자들을 응원하며 도보 행진을 하고 있는 그는 행진이 끝나는 다음달 1일 태완씨 어머니를 만날 예정이다. 그는 “사과조차 하지 않는 회사의 대응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며 “회사는 유족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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