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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 (목)

포스트휴먼과 대화의 기술 [크리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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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백남준, TV 부처, 1974(2002), 백남준아트센터 소장. ©백남준 에스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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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승 | 미술사학자·상명대 초빙교수



“길들인다는 게 무슨 뜻이야?” “모두가 너무 잊고 있는 것 … 그건 관계 맺는다는 뜻이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아주 참을성이 있어야 해 … 너는 말을 하지 마. 말은 오해의 근원이야. 그러나 하루하루 조금씩 가까이 앉아도 돼.”



어느 소행성의 어린 왕자는 지구에서 여우와 대화를 나누고, 별에 두고 온 장미꽃 한송이에 길들인 책임을 느끼게 된다. 꽃과 관계 맺고 여우와 대화하는 어린 왕자야말로 21세기 포스트휴먼형 존재가 아닐까 불현듯 생각이 미친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생텍쥐페리의 1943년생 ‘어린 왕자’에 다시 한번 탄복한다.



포스트휴먼 시대라 한다. 과학의 진보로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한 이후의 인간 세계를 뜻한다. 기술 환경 측면에서의 명명인데, 대개는 곤경의 조건으로 논의된다. 인간의 물리적 조건을 뛰어넘는 기술을 발전시켜 그 기술을 이용하면서 오히려 기술에 종속된 오늘의 우리를 가리킨다. 한때 인간의 도구였던 기계와는 이제 주종 관계가 뒤바뀐 듯 인간 삶은 철저하게 기계 기술에 둘러싸여 있다.



당장만 해도 노트북이 있어서 글을 쓰고, 노트북은 전기 충전기와 연결돼 있다. 틈틈이 시계를 봐 가며 마감 시간 내에 원고를 완성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와이파이로 인터넷에 접속해 신문사 기사전송시스템에 칼럼을 송고할 터다. 어느 하나 기술이라는 매개체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그러니까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독자에게 이 글이 닿는 것도 모두 기계 덕분이다. 신유물론의 관점에서 보는 기계와의 관계는 이렇듯 의존적이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처지가 된 포스트휴먼은 세계의 주인 행세를 해 온 그간의 오만을 되돌아보는 중이다. 그 대표 격인 프랑스 출신의 과학철학자 브뤼노 라투르(1947~2022)는 비인간과의 대칭적 관계성을 요청했다. 동식물은 물론 기계를 포함한 비인간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 이제 비인간도 능동적 행위자로 인정하고 동맹을 맺는 편이 결국은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했다.



인간을 위협하게 된 작금의 생명 위기가 자연을 철저하게 대상화한 위계 관계에서 비롯됐다는 진단 앞에서 인간부터 살고 보자는 식의 언사는 되레 비인간적이다. 행위자 간 연결망을 강조하는 라투르의 이론에서 핵심은 길들이기에 있다. 관계의 계기가 되는 차이를 대등하게 연결 짓자면 마치 어린 왕자처럼 서로를 길들이는 법을 배워야 상호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지론이다. 연결망을 만들어내는 길들이기를 라투르는 번역 과정이라 부른다.



행위자 간 대칭적 관계를 미술 작품에서 찾자면 백남준의 1974년 작 ‘티브이(TV) 부처’를 예로 들 수 있다. 정면에 설치된 카메라가 부처상을 찍어 티브이 모니터로 송출하고, 부처상은 티브이 앞에 앉아 해당 화면을 마주 보는 작품이다. 티브이는 서구의 기술을, 부처상은 동양의 사유를 은유한다고 이분법으로 나눠 보면 티브이와 부처상은 다른 성질의 행위자들인데, 티브이는 부처상을 비추고 부처상은 티브이를 바라보며 대칭적 태도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전기만 있다면 관계가 영속적인 이 작품에서 티브이도 부처상도 말이 없다. 인간의 언어가 관계에 필요조건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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