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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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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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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 철학자



‘드라마’라는 말은 우리 일상과 함께하고 있다. 이 외래어는 그 원래 뜻으로부터 다양하게 변주되어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텔레비전 연속극’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왔다. 서구 영어권에서는 매체를 통해 방영되는 연속극을 통상 ‘텔레비전 시리즈’라고 한다.



최근 텔레비전뿐만 아니라 오티티(OTT) 서비스를 통한 연속극 방영이 늘어나고 한류 콘텐츠가 성행하면서 이른바 ‘케이(K)-드라마’는 언어 사용에서도 국제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비영어권뿐만 아니라 영어권에서조차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로 드라마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는 수입해서 잘 사용하던 말에 특별한 의미를 덧붙여 다시 수출한 격이다.



서구에서도 드라마라는 말을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하지만, 원래 뜻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 드라마의 원류를 찾아가다 보면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 이르게 된다. 그 말의 뿌리도 그리스어에 있다. 드라마(drama)는 ‘행동하다’는 뜻의 ‘드란’(dran)과 ‘나는 한다’는 의미의 ‘드라오’(drao)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드라마는 극 중 배우가 ‘인간 행위’를 모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후에 라틴어의 영향을 받은 서구어에서 배우(actor)를 행위(action)하는 자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런 문화적 전통 아래에 있음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에서 드라마는 세 가지 문예 양식을 포함했는데, 비극, 희극, 풍자극이 그것이다. 인간 행위와 이들 문예 양식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면 우리 삶에 대한 깨달음도 얻을 수 있다. 드라마는 극 중에도 있지만, 극 밖의 우리 삶에서도 ‘드라마틱’(dramatic)한, 곧 극적인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시학’(詩學)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2300여년 동안 문학을 비롯한 예술 창작자들이 인정하는 필독 고전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잘 알고 있지만, 일반인들에겐 저서 제목에 있는 ‘시’라는 말이 혼란을 줄 수도 있다. 원서 제목에 있는 ‘포이에티케’(poietike)는 시 짓기에 머물지 않고 모든 창작술을 의미한다. 이는 ‘만듦’을 뜻하는 ‘포이에시스’(poiesis)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는 문예창작술에 관한 것이다. 저서의 상당 부분은 유실되고 우리에게는 비극 창작에 관한 부분만 전해지지만, 이 부분만 보아도 문예창작 전반에 관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창작자는 그냥 사람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람을 모방한다”고 선언한다. 곧 인간의 행위를 모방해서 표현함을 역설한다.



드라마의 어원인 ‘드란’은 행함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단어들 가운데 가장 강한 어감을 주는 말로 알려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아테네 사람들은 행위를 뜻하는 단어로 ‘프라테인’(prattein)을 사용하지만, 그리스반도 북부 사람들은 ‘드란’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자신들이 비극과 희극의 창시자임을 주장한다”고 소개하고 있다(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그 지역 출신이다).



그렇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행위’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인간의 행동은 포괄적 개념이다. 그것은 순수하게 외적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외부로 작용하는 내적 과정의 표현이다. 외적 행위는 정신 활동의 과정, 영적 움직임같이 보다 깊은 근원으로부터 표출된 것이다. 곧 행위라 함은 행한 일들과 그에 따른 사건들뿐만 아니라, 정신적 과정들, 외부 사건들의 기초를 이루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동기들을 포함한다. 그것은 일정한 결말을 향해 함께 작동하는 모든 힘을 나타낸다.



이에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 작가들은 ‘행운과 불운을 모방’할 게 하니라, ‘행동과 삶을 모방’하라고 한 이유가 분명해진다. 외적 운의 전환으로 밝음에서 어두움으로 이야기의 파국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피상적인 것이다. 그런 전환들은 행동의 내적 의미를 드러내는 매개체일 뿐이다. 그의 말처럼 “삶의 행복과 불행은 행위에 있다.” 인간이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은 자신의 행동에 의해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플라톤이 저서 ‘국가’에서 한 말을 상기시킨다. 모방의 기예는 “강요된 행동 또는 자발적 행동을 하는 인간을 모방한다. 이들은 행함을 통해 자신들이 훌륭하게 행했다거나 잘못 행했다고 생각하며, 이 모든 것에 대해 괴로워하거나 기뻐한다.” 플라톤 역시 행위자로서의 성취와 실패, 그에 따른 행복과 불행을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우리가 우연이라고 여기는 것도 어떤 특정 행위의 필연적 효과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자연학’ 저서에서 이런 역설을 말한다. “우연의 결과는 행위자와 연관 있다. 행위자는 행운과 불행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연은 필히 행위의 영역에 있다.”



사람들은 극 중 이런 삶의 진실을 ‘발견’하며 감탄하지만, 자신의 일상에서는 종종 잊고 있다. 17세기에 탁월한 드라마 평론을 썼던 존 드라이든도 인간의 이런 일상적 아이러니를 지적한 바 있다. “모든 계획의 변경이나 방해, 모든 갑작스러운 감정, 이런 전환들은 인간 행동, 특히 가장 고결한 행동에서 그 일부를 이룬다. 단지 그것들이 닥치기 전까지 우리는 어떤 것도 그것이 ‘행동’이라고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는 때로 일상적 삶을 ‘인생 드라마’라고 표현한다. 우리 각자는 행동하며 살기 때문이다. 행함이 곧 살아감이다. 현실의 드라마에서 핵심적인 것은 ‘나의 행동’이다. 누구든 ‘나는 한다’라는 삶의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대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처한 외부적 조건 및 사회구조 그리고 생물학적 결정론을 탐구해왔다. 인간은 잘못을 저지르고 실수하는 동물이다. 그러기에 다양한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에 대한 배려로 고귀한 것이다.



그러나 균형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하다. 현대인들이 주위 환경, 생활 조건, 유전적 영향의 변론에 귀 기울이는 만큼, ‘나의 행동’에 대한 진솔한 성찰 역시 필요하다. 인간 삶에는 모든 결정론이 결정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자유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며, 인생 드라마는 각자 자신이 ‘행위의 연속극’처럼 써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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