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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왜 연애도 안 하고 애도 낳지 않느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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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여성단체 비웨이브(BWAVE)가 2017년 1월6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후문에서 손팻말을 들고 정부의 ‘출산지도’에 항의하고 있다. 2016년 12월29일 행정자치부는 전국 243개 지자체의 가임기 여성 수를 표기한 ‘출산지도’를 만들어 ‘여성을 암소, 출산기계로 본다’는 항의가 빗발쳤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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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출산의 주체로서 여성이라는 뜻을 담아 ‘저출생’이 아닌 ‘저출산’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아테네 여성 리시는 스파르타와 오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남성들의 폭주를 멈추게 하려고 ‘섹스 파업’을 주도한다. 여성들은 아크로폴리스에서 점거농성을 하고, 양국은 결국 강화조약을 체결해 전쟁을 멈춘다. 고대 그리스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BC448∼380년)가 쓴 희극 ‘리시스트라타’의 내용이다.



실제로 아프리카 토고, 일본, 필리핀, 이탈리아, 콜롬비아, 벨기에 등 세계 곳곳에서 정치적 견해를 표출하는 방법으로 여성들이 섹스 파업을 선언했다. 한국에서는 2016년 여성들이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며 ‘섹스 파업’이라는 손팻말을 들고 행진했다. 이를 전후해 한국의 여성 청년들은 한발 더 나아가 이성애적 로맨스 자체를 거부하고 비연애, 비섹스, 비혼, 비출산을 가리키는 4비(4B·4非)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이는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를 상징하는 일시적인 구호 중 하나일 뿐이며 치기 어린 해프닝이라고 대체로 조롱받았다. 한편으론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펼치는 4비운동이 경제적 문제 때문에 연애·결혼·출산을 미루는 ‘3포 세대’와 다르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 운동은 여성들이 자신의 미래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국가에 동원되는 미래를 거부하는 적극적인 의사표명이라는 분석이었다. 삶의 불안정성과 성차별적 경험을 가진 젊은 여성들의 진지하고 비판적인 저항이라는 뜻이다. (이지은·정의솔, 2021)



저출산 현상은 아이 낳지 않는 젊은 여성에 대한 낙인을 가속화했다. 한국에서 가임기 여성(15~49살) 1명이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를 가리키는 ‘합계출산율’은 1970년 4.53명이었다. 국가는 “둘만 낳자” “둘도 많다” 등의 구호를 동원하며 극단적인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1983년 합계출산율은 인구 대체수준 2.10명 아래인 2.06명으로 떨어졌고 2000년엔 1.48명, 2010년 1.23명, 2023년 0.72명으로 계속 낮아졌다.



2005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가 연 전국여성대회에서 이미 ‘윗세대’ 여성들은 젊은 여성들의 저출산을 “퇴폐적 상황”으로 규정했다. 참석자들은 “출산은 여성의 창조적 의무” “출산이 애국이다”라고 외쳤다. ‘젊은 여성’의 부도덕 때문에 국가적 위기가 심화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떤 정권이든 국가가 상정한 ‘정상 가족’은 혼인으로 맺어진 이성애 부부가 두 자녀를 낳아 기르는 부계 혈통 중심의 4인 가족이었다. 정책의 기본 단위도 ‘가족’이지 ‘개인’이 아니었다. 저출산 정책을 논하는 테이블에는 검은 옷을 입은 중장년 남자만 즐비했고 “당사자 여성 없는 여성 정책”(신경아)이란 비판이 나왔다.



여성을 개별 인격체가 아닌 인구 재생산의 도구로 삼았기 때문에 더더욱 당사자들을 자극하는 사태도 적지 않았다. 2016년 12월 행정자치부는 전국 ‘가임기 여성’의 수를 표시한 ‘대한민국 출산 지도’를 온라인에 배포했다. 2017년 국책 연구기관인 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이 연 인구포럼에서 보사연 소속 한 전문가는 “여성의 교육수준과 소득수준이 상승함에 따라 하향선택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관습”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콧대 높아진 여자들’이 비슷한 계층끼리 결혼하는 동질혼(호모가미)이나 고소득 남성과 결합하는 상승혼(하이퍼가미)을 추구하기 때문에 저출산이 생겼다고 보고, 문제의 원인이 이기적인 여성에게 있다고 지목한 셈이다. 2018년 5월 법무부가 헌법재판소에 낸 낙태죄 공개변론 요지서에서 낙태하려는 여성은 “성교는 하되 그에 따른 결과인 임신 및 출산을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이런 비난과 낙인 담론이 공적 발화될 때마다 당사자 여성들은 자신의 몸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깨닫게 됐고 “내 자궁은 공공재가 아니다”라며 항의했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강조하는 페미니즘의 가장 유명한 슬로건은 “나의 몸, 나의 선택”이다. 백인 남성우월주의자 인플루언서인 닉 푸엔테스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다시금 승리한 뒤 “너의 몸, 나의 선택, 영원히”라는 말을 엑스(옛 트위터)에 올렸는데 이 글은 3500만번 이상 조회됐다. 트럼프는 페미니즘 백래시(반동)를 일삼은 남성 커뮤니티와 인플루언서들을 공략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자를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펼친 반페미니즘 전략과 비슷했다.



섹스와 출산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기에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아미아 스리니바산 옥스퍼드대 석좌교수는 “남성에게 강제로 섹스할 권리가 있다는 잘못된 확신”은 정치적 패러다임의 문제라고 보았다. 트럼프의 집권은 곧 강제로 섹스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남성우월집단들의 승리처럼 여겨졌다.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이야기’에서 가부장적 전체주의 국가 길리어드의 여성들은 인구를 낳는 도구로 전락한다. ‘반낙태주의’ 트럼프 정권을 맞이하게 된 여성들은 애트우드의 페이스북에 ‘길리어드의 도래’라고 댓글을 달았다. 한국의 페미니스트 운동에서 영감을 얻어 미국 여성들은 긴 머리카락을 자르면서 이성애적 관계를 포기하겠다고 ‘4비 운동’을 선언했다.



제2 물결 페미니즘 시대에 활동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인공 자궁을 이용해 여성 착취를 종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섹스와 출산은 확실히 인류가 알지 못하던 기술의 미래로 가고 있지만, 파이어스톤이 원한 방식은 아닌 것 같다. ‘섹스돌’을 ‘로켓배송’으로 받을 수 있는 시대, 남성 소비자들은 사용 후기 댓글로 위생이니 질감이니 시시콜콜 ‘품평’을 올린다. 이 인형은 피부나 뼈관절이 실제 여성 신체와 유사한 건 물론이고, 특정한 얼굴을 주문하는 ‘커스텀 제작’도 가능하다. 지난 9일 한국여성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김주희 덕성여대 차미리사교양대학 교수는 얼굴을 갈아 끼울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부각되는 섹스돌의 사례를 들며 “여성 신체 주문 자체가 즐거움이 되었다”고 우려했다. “여성 형상은 조립 가능한, 소비되고 대체하고 버려질 수 있는 물질이 됐다.”



사실 이성애 섹스는 그 자체로도 오랫동안 여성에게 불편하고 불안한 행위였다. ‘성적 동의’는 복잡한 문제고, 뚜렷한 폭행이나 협박의 증거가 없다면 누구든 법정에서 강간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 섹스할 때 ‘몰카’(불법촬영)를 의식해야 하는 것을 넘어 이제 ‘딥페이크 성착취물’로 여성 얼굴이 탈취·합성되며 벌거벗은 몸의 이미지가 유포·판매되는 시대다. 자본주의는 점점 섹스와 성폭력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웹하드 업체는 대량의 디지털 성범죄 동영상을 묵인하거나 적극 관리하며 유통한다. 손희정 경희대 교수는 여성의 신체를 돈이 되는 자원으로 이용하는 자본주의를 ‘디지털 고어 자본주의’라고 명명했다. “‘고어 자본주의’의 핵심은 폭력이 정확하게 신체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지난 15년 동안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살해된 여성과 주변인은 최소 1672명에 이른다. 2015년 전후 한국의 ‘페미니즘 리부트’는 까닭 없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좌절된 남성성과 가부장적 국가가 협공하는 일상의 여성 혐오와 공격에 대한 대응이었다. ‘허영심 많고 비윤리적인 젊은 여자들 때문에 나라가 소멸된다’는 비난 담론 속에 비혼 여성에게 불이익을 주고 기혼 남성 세대주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저출산 해법’을 내놓는 곳에서 당사자들이 ‘인구 정책’에 동의할 리 없다.



정치적으로 점점 보수화되는 젊은 남성에 견줘 진보적 사상을 지니게 된 여성들은 사랑과 돌봄을 대등하게 나누는 인격체가 아니라 섹스할 수 있는 ‘몸’으로만 환원하는 이성애 관계에서도 회의나 불안감을 느끼는 수가 많다. ‘같은 인간’으로 사랑과 체온을 나누면서 민주적인 연인 또는 가족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성별과 무관하게―홀로 살기를 선택하거나 새로운 ‘곁’을 만들고 있다. 그 친족 공동체는 착취 없는 인간이나 ‘비인간’ 동물 친구들과 함께하며, 헤어진 뒤 폭력이 두려워 몸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관계다. 가부장적 국가와 부계 혈통 가족 관계와는 다른 미래와 세계를 선택하며 그들이 움직이고 있다.





※ 참고자료: 논문 ‘The 4B movement: envisioning a feminist future with/in a non-reproductive future in Korea’ (이지은·정의솔, 2021), 단행본 ‘섹스할 권리’(아미아 스리니바산 지음, 김수민 옮김, 2022, 창비), 단행본 ‘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손희정·신경아 등 지음, 2024,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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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 한겨레21 선임기자
한겨레 편집국 문화부, 편집부, 사회부 기자를 거쳐 책지성팀장과 토요판 부장을 지냈다. 대학원에서 여성학과 문화학을 공부했고 감염병과 주부주체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지성이 금지된 곳에서 깨어날 때’가 있고, ‘엄마도 아프다’ ‘종이약국’을 다른 필자들과 함께 썼다. ‘바디올로지’는 ‘몸’(body)과 ‘학’(-logy)의 합성어로, 지난 100년 동안 미디어를 통해 유포된 몸 담론을 씨앗으로 전쟁터나 다름없는 몸과 젠더, 장애, 노화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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