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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그룹 총수는 대통령의 부하가 아니다 [왜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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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엑스포 유치에 실패한 직후인 지난해 12월6일 윤석열 대통령이 부산 중구 깡통시장에서 기업 총수들과 함께 떡볶이를 시식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정기선 HD현대 부회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윤 대통령,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재원 SK수석부회장.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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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균 | 한양대 명예교수



윤석열 대통령은 검찰총장이었던 2020년 10월22일 국회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검찰총장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라며 기개를 과시했다. 여주지청장이었던 2013년 국감장에선 국정원 댓글 수사 외압 관련해서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라고 발언했다. 이를 그대로 인용한다면 “그룹 총수는 대통령의 부하가 아니다”.



윤 대통령은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해서 96개국 정상과 150여차례 만났다. 그 과정에서 국내 10대 그룹 총수들이 총동원되었다. 윤 대통령과 그룹 총수들의 공식적인 만남은 2023년에만 한달에 한번꼴인 12차례에 달하며 비공식 일정까지 포함하면 더 늘어난다. 그렇지만 엑스포 유치 결과는 29대 119였다. 윤 대통령이 해외 순방 때마다 그룹 총수들을 동원한 것도 문제인데, 엑스포 유치에 참패하자 다시 부산에 불렀다. “쇼”라는 논란과 함께 “바쁜 총수들을 대통령 행사에 병풍으로 세우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윤 대통령은 2022년 취임 이후 해외에 19번 나갔다. 그중에서 4대 그룹 총수를 동원한 것이 10여 차례나 된다. 그룹 총수를 해외 순방에 동원한 것은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을 자처한 윤 대통령이 가장 심한 축에 속하지만, 역대 대통령들의 공통된 관례다. 이유는 한국의 국제 역학 구조에서 기인한다. 최근 미국의 주간지 ‘유에스(US)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가 보도한 자료를 보면, 국력 평가 순위에서 한국은 미국, 중국, 러시아, 독일, 영국에 이어 종합점수 64.7점으로 6위를 기록했다. 국력을 평가한 6개 부문별로 보면, 한국은 △수출 호조(84점) △경제적 영향(79.8점) △군사력(79.1점)이 상위였지만 △국제 외교(66.4점) △정치적 영향력(48.6점) △리더십 역량(22.5점)은 낮은 순위를 기록했다. 세부적으로 보면, △국내총생산(GDP) 순위 10위 △반도체를 비롯한 기간산업 5위 이내 △수출 5위 △디지털 경쟁력 8위 △인공지능(AI) 경쟁력 7위 △군사력 6위 △원자력 산업 6위 △항공우주산업 7위 △방위산업 8위 등이다.



영미를 포함한 선진국이 정치·외교 리더십이 없는 한국 대통령을 초청하는 이유는 동행한 그룹 총수들이 가져올 경제적 선물에 관심이 많아서다. 그룹 총수의 병풍 없는 한국 대통령의 해외 순방은 초라하다. 당연히 대통령의 단독 방문보다는, 선물 꾸러미를 잔뜩 준비한 그룹 총수를 동반한 대통령의 패키지 방문을 선호한다.



그러나 그룹 총수의 대통령 병풍 역할에는 두 가지 우려가 있다. 하나는 부족한 외교·정치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그룹 총수들에게 해외 투자를 권장할 우려다. 2023년 한해 동안 한국 기업이 미국에 투자한 금액은 모두 30조원으로 미국의 최대 투자국이었던 것이 그 근거다. 또 하나, 기업의 자원이 낭비되는 것은 물론이고 중요한 정책적 결정이 지연된다. 실제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해 12월11~15일 대통령의 네덜란드 순방에 동행하느라 12월14일부터 사흘간 열린 삼성전자 글로벌 전략회의에 불참했다. 삼성전자 글로벌 전략회의는 매년 6월과 12월 두 차례 국내외 임원급이 모여 사업 부문·지역별로 현안을 공유하고 내년 사업 목표와 영업 전략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자리다. 삼성반도체 사장이 실적 부진으로 반성문을 쓰고 삼성전자가 ‘4만 전자’로 추락하는 현실이 우연만이 아님을 실감한다.



삼성그룹 매출액은 2023년 기준 400조원, 5대 그룹의 매출은 1000조원을 초과한다. 7조원의 투자를 유치했다고 하는 대통령실의 주장을 수용한다고 해도 기업 총수 부재로 인한 기업의 손실에는 미칠 바가 아니다. “정치·외교는 대통령에게, 경제는 기업 총수에게”라는 분업의 법칙은 “기업 총수는 대통령의 부하가 아니다”라는 말만큼 절실하다. 대통령이 “영업사원 1호”가 되는 것은 정치·외교력이 기업 경쟁력보다 우세한 나라들의 일이지, 정치·외교력이 기업 경쟁력보다 약한 한국 대통령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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