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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옆방에 있어 줄래?” [정끝별의 소소한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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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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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 시인·이화여대 교수



지난 주말 문상을 다녀왔다. 오늘도 부고 문자를 받았다. 나는 마침 영화 ‘룸 넥스트 도어’를 보고 나오던 참이었다. 영화는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죽음에 대해 자기 결정을 하는 이야기였다. 잡지사에서 일하며 젊음을 함께 했던 마사와 잉그리드는 연락이 끊긴 채 종군 여기자와 여성작가로 각자의 삶을 달려왔다. 우연히 암 투병 중이라는 마사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잉그리드가 병문안을 가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암이 날 죽이게 두고 싶지 않아. 나는 존엄을 지키며 잘 죽을 권리가 있어.” 마사는 항암치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존엄사를 결정한다. “옆방에 있어 줄래?” 죽음이 두렵지는 않으나 혼자 죽기는 싫다며 잉그리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마사가 꿈꾸는 존엄한 죽음에는 ‘옆방’으로 상징되는 공감과 배려, 돌봄과 믿음이 함께한다. 죽음에 다가가는 과정, 죽음의 방식, 사후 처리는 정교하면서도 간결하다. 좋아하는 책과 영화와 그림과 자연과 추억을 공유하며 곁을 지키는 잉그리드 덕분에 마사는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통제하는 의지를 가질 수 있었다.



지난해 나도 92살의 죽어가는 엄마 ‘옆방’에 있었다. 엄마도 죽음 자체보다는 자신의 죽음이 방치되거나 외면되는 것을, 그러니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했다. 어떤 때는 10분 간격으로 옆방에 있는 나를 부르시곤 했다. “엄마 혼자 있게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 안심시키고 돌아오면, 금세 또 부르셨다. 온갖 용무 아닌 용무와 핑계 아닌 핑계를 대시다가 궁해지시면 그때서야, “네가 있나 보려고” 혹은 “나 죽는 시간을 네가 알아야 하니까”, 그러셨다.



85살의 아버지가 죽어갈 때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옆방’을 지키지 못했다. 입원 치료가 길어지면서 아버지는 링거 바늘을 뽑아 던지며 치료를 거부했다. 나는 아버지를 달랬다. 아버지 죽음은 아버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토록 애면글면했던 자식들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잘 견디셔야 한다고. 아버지는 수긍하셨고 그렇게 몇달을 더 버티시다가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셨다. 혼자서 죽음을 맞는다는 건 먹먹한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8년 전쯤 디그니타스라는 스위스의 조력 존엄사 기관을 알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그런 기관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낯설었다. 조건, 가입, 절차, 비용 등을 폭풍 검색했다. 스위스는 존엄사가 외국인에게도 허용되는 나라였고 마지막으로 스위스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시를 향해 부나방처럼 달려들며 20대를 함께했던 독일로 이민 간 친구가 떠올랐다. 스위스는 독일과 가까우니 달려와 줄 테고, 여행을 하며 각자의 삶을 달리느라 비어있던 긴 공백과 그 공백을 넘어서 여전히 공유하는 것들을 나눌 수 있을 텐데….



그리고 ‘디그니타스’라는 시를 썼다. “디그니타스, 선택과 결단이 묻어나는 소리다/ 사랑의 아모에니타스와 자유의 리베르타스가 이웃한/ 디그니타스 디그니타스, 디스토피아 과거완료형만 같고 디즈니랜드 미래완료형만 같다.” 여전히 존엄한 죽음이란 내게 선택과 결단, 사랑과 자유에 이웃한 것이자 디스토피아의 끝이나 디즈니랜드 시작과 동의어일 것만 같다.



내 상상 속 디그니타스처럼, 영화 속 ‘룸 넥스트 도어’는 세팅된 무대처럼 단정하고 완벽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현실에서 그런 존엄을 갖출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현실에는 지지고 볶고 얽히고설킨 가족관계가 있고, 간결한 죽음으로 인도할 그런 약을 구할 수도 없고, 그렇게 아름다운 별장은 물론 동행해 줄 친구도 없는 게 태반이다. 현실은 영화 ‘플랜 75’에 가깝다. “노인안락사 시행 3년 차 경제효과 1조원”이라는 기치 아래, 고령 인구의 부양 부담을 줄이기 위해 75살 이상 국민의 죽음을 적극 지원하는 정부 정책 ‘플랜 75’의 가상현실이 더 실현 가능한 현실이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는, 삶을 살아내는 태도와 자세만큼이나 어려운 문제다. 임박한 자신의 죽음 앞에서 존엄한 죽음을 꿈꾸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러나 ‘존엄한’ 태도와 자세에 대한 해석은 각기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물을지 모른다. 존엄한 죽음이란 게 있기나 하냐고. 죽음에 인간으로서 자기결정권이 가당키나 하냐고. 존엄사, 안락사, 조력사가 모두 살인 또는 과실치사로 간주되며 조력 혹은 방관한 사람이 중범죄자가 되는 나라에서는 더더욱.



죽음은 우리의 미래다. 우리에게는 잘 죽을 권리가 있다. “눈이 내린다, 온 우주에 희미하게, 모든 산 자와 죽은 자 위로.”(영화에서 반복되는 제임스 조이스 소설 ‘죽은 사람들’의 마지막 문장) 내리는 눈을 ‘잘’ 맞을 권리가 우리에게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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