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환자를 본다고요? 그런데 한의사라고요?"
한의대를 졸업하고, 보통의 한의사와 달리 죽음을 목전에 둔 암 환자를 보는 한의사가 됐습니다. 대학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였던 아버지 때문에 암 환자가 그리 낯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늘 “1000명 중의 999명은 필요 없다고 말해도, 살려달라는 나머지 단 1명의 환자의 부탁을 들어주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신 지금, 나는 아버지가 말씀하신 그런 일을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더중앙플러스의 암 환자를 돌보는 한의사 이야기, '김은혜의 살아내다'. 중앙일보 독자들을 위해 한 편을 전문 무료로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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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 환자분이 찾아왔다. 말간 얼굴을 하고 혼자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지만 눈빛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환자는 나의 한마디 한마디를 굉장히 집중해서 들어 주었다. 대화가 끝나가자 환자는 다급히 내 가운의 소매 끝을 잡으며 말했다. “선생님, 저 진짜 정말로 살고 싶어요.”
살고자 하는 의지를 이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환자를 오랜만에 본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서 “네, 저도 열심히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환자는 다시 가운을 꽉 쥐어 잡으며 한 번 더 말했다. “네, 저, 어떤 상황에서도 진짜, 살고 싶어요.”
같은 말을 또박또박 반복하기에 뭔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건가 싶은 의문이 잠깐 들었지만, 이내 금세 잊혔다. 약간의 찜찜함만 남았던 첫 만남이 지나고, 시간이 흘렀다. 항암 치료를 몇 달간 쉬지 않고 받아 왔던 환자는 중증의 빈혈이 생겼다. 항암 치료의 대표적인 부작용인 적혈구 수치가 떨어진 것이었는데, 어느 날 시행한 혈액검사에서 정상 수치의 절반도 되지 않는 결과가 나왔다.
드물지는 않은 일이나 이 환자에게 수혈이 필요할 정도로 적혈구가 떨어진 적은 처음인 것 같아 처치 과정을 설명하고자 환자의 병실로 들어갔다. 항상 말갛게 유지되던 얼굴은 빈혈 때문인지 허옇게 떠 있었다. 그럼에도 음식을 꼭꼭 씹으며 차분하게 식사하고 있었다.
‘오늘 수혈받으셔야 될 것 같습니다. 오늘 혈액검사에서 빈혈 수치가 6으로 나오셨어요. 항암 치료를 받으시는 분들에서는 종종 나타나고, 수혈받으면 수치도, 컨디션도 곧잘 회복되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전하기 위해 입을 뗐다. “오늘 수혈받으셔야….”
사진 셔터스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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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쇠 밥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튕기며 내는 시끄러운 소리에 내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네? 수혈요?” 환자의 물음에 대답하려고 했지만 몇 초의 순간 만에 허옇게 뜬 수준을 넘어서서 창백하게 질려버린 환자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입이 다물어졌다. 환자의 손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잠깐의 적막이 흘렀고, 먼저 입을 연 건 환자였다.
" 방금, 수혈이라고 하신 것, 맞나요? "
여전히 질려 있는 얼굴에, 그대로 뒀다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 환자를 눕혔다. 내가 팔을 잡는 것과 동시에 환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이어지는 나의 부연 설명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환자는 ‘한숨 자고서 수혈할지 말지 결정해도 되겠느냐’는 말을 했다. 그리고 환자는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수혈을 받겠다고 말했다. 어떤 사정인지는 몰라도 그 말을 하는 환자는 비장해 보였고, 그래서인지 빈혈 수치가 잘 회복된 이후에도 며칠간 신경이 더 쓰였다. 컨디션도, 의지가 가득하던 눈빛도 모두 회복한 환자는 다음 항암치료를 받고 위해 무사히 퇴원했다. 하지만 다음 날, 그녀가 ‘수혈’이라는 말에 하얗게 질렸던 이유를 알게 되고 말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출근을 준비하던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하고 받자 상대방에게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이 들려왔다. 뜬금없는 폭언에 기분이 나쁠 새도 없었고, 나는 ‘누구신데 이러시죠?’라고 물었다. 대답은 “내가 ○○○ 시어머니 되는 사람이다! 내가 ○○○이 보호자인데 잠깐 방심한 틈에 이런 짓을 벌여? 이 X아!”였다.
수혈 일이 있었던 그 환자의 시어머니라는 얘기였다. 계속되는 욕설 속에 그녀가 ‘수혈’이라는 단어에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일절 반응하지 않으며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당신이 뭔데 내 아들 핏줄 낳을 애한테 그런 더러운 걸 집어넣어! 남의 피 받으면 부정타는 거 몰라? 너, 하늘에서 천벌 내릴 거야! 이 몰상식한 X아! 너 같은 돌팔이한테는 다시는 안 가!” 시댁이 수혈을 포함한 특정 치료에 확고한 관념이 있는 집안인 듯했다.
하지만 처음 환자가 나를 붙잡고 굳이 ‘어떤 상황에서도’ 살고 싶다는 말을 강조했던 것을 보면 몇 번의 충돌이 있었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었다. 본인의 동의를 받은 의학적으로 아무 문제 없는 처치였기에 몇십 분간 듣고 있던 나는 “더 할 말 있으시면 병원에 오셔서 직접 이야기하시라”는 말을 전하고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다음 날, 또 다른 모르는 번호에서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선생님, 저 ○○○입니다. 어제 일 전해들었습니다. 어떻게 선생님 개인 번호를 알아내신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죄송하다는 말 대신 드립니다. 저는 제가 선생님 처음 뵌 날 드렸던 그 부탁을 잊지 않으시고, 제가 또 한 번 살 수 있는 의지를 다지고 치료받을 기회를 주신 분께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잊지 않고 끝까지 이겨내서 건강한 모습으로 저 혼자서 꼭 찾아뵙겠습니다. 이 문자를 마지막으로 저 포함 가족들이 연락드릴 일은 없을 겁니다. 다시 한번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전한 환자의 소식을 다시 들은 건 몇 달 뒤의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어머니라고 말씀하시던 그분으로부터였다. “우리 손주 애미 좀 살려주세요.” 보호자는 항암 치료를 받던 병원으로부터 환자가 말기 선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앞으로 몇 개월을 살 거라고 들은 것도 충격인데, 지금 의식이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지금 있는 곳에서 정리가 다 끝나면 오실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다’고 대답했지만 다음 날, 환자가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환자의 시어머니가 퍼붓던 욕설을 기억하고 있는 만큼 완전히 바뀐 목소리를 들었을 때 아쉬움이 컸다. 만약 ‘처음부터, 환자가 내 가운을 꽉 붙잡아서 부탁해야만 했던 그때부터 이런 변화가 있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환자가 겪었을 마음고생과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다. 환자를 지키는 것은 의료진의 몫인 만큼, 서로 다른 의견을 가졌더라도 조율해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시어머니는 나름대로 당신의 신념으로 며느리를 지키고자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이 가족이 극단적인 예일 뿐, 많은 환자가 투병에서 힘든 점 중 하나로 가족들과의 소통이라고 꼽곤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극복했던 환자들은 하나같이 ‘배려와 대화’를 해결 방법이라고 말했다. 배려와 대화에도 환자의 회복을 최우선에 둬야 한다. 환자와 가족, 의료진 모두 결국 같은 것을 바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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