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은 평행한다. 하루 차이임에도 영원히 서로 만나지 못하는 건 이 때문이다. 과거로 건너갈 순 없고 이렇게 기억을 뒤적인다. 오래전 고등학교 지구과학 수업 시간. 선생님이 칠판에 점과 동그라미를 그렸다. 태양과 지구. 점에서 방사상으로 화살표를 죽죽 그었다. 보거라, 이렇게 햇빛이 우주에서 오는데, 그 거리가 하도 멀어서 너희들 등에 도착하는 햇살은 모두 평행하다고 간주한다! 이상하게도 이 말이 깊은 울림을 남겼다.
날씨는 누구나 공통으로 입는 공중의 옷이다. 하루 차이인데도 내일의 옷은 맞추기가 영 힘들다. 사계절에 밀착하며 살고 싶어 글쓰기에 능한 젊은 마케터와 저 절기를 짚어가면서 궁리출판 소식지에 편지를 교환하고 있다. 이렇게라도 해서 우리를 감싸고 도는 날씨 변화를 제때 껴입고자 하는 것이다.
입춘에 시작했는데 어느덧 입동이다. 우리의 무심한 감각이라면 거저 입동(入冬)이겠지만 입동(立冬)이다. 자연에 인격처럼 격(格)을 부여하고 사람하고 나란히 독립적으로 서는 뜻을 담은 말이겠다. 입(立)을 보면, 평행의 기운을 잘 받드는 글자라는 느낌이 든다. 천하에서 나무나 사람만큼 우뚝한 것도 드무리라. 이들은 서로 서서 땅과 하늘을 잇는다. 말하자면 대지와 하늘은 물론 그 사이를 떠받치는 존재들은 서로 나란히 있는 것. 이처럼 사실과 사물과 사람은 이 세계 내에 서로 평행하게 어울리며 안개처럼 서성거린다.
절기에 관한 자료를 찾는데 정확히 8년 전에 쓴 메모가 나왔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평행 우주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사는 세상도 인물(박근혜/윤석열, 트럼프/트럼프)만 교체할 뿐, 참으로 평행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면서 여기에 인용한다. “서리 내린다는 상강 지나고 며칠 후, 심학산에 올랐다. 5시 근방인데도 벌써 어둑해진다. (…) 미국의 대통령 뽑는 선거에 충격을 먹은 모양이다. 사람들이 핸드폰에 머리를 박고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미국발 소식에 놀라고 있다. 럭비공 같은 아메리카 대통령, 신뢰가 땅에 떨어진 코리아 대통령. 평행인가. 심학산 정상에 서니 힐러리와 맞붙은 트럼프가 승리를 선언했다는 속보가 뜬다. 머리 들어 보니 지는 해와 뜨는 달이 하늘에 나란하다. 짙어가는 어둠이 세상을 점점 조이고 있다. 입동 근처, 2016.11.8.”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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