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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 (목)

[사유와 성찰]폭력의 시대와 동안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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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생명은 물론 삶의 터전까지 잿더미로 만들어버린다. 증오와 원한의 통곡 소리가 하늘을 뒤덮고 보복이 보복을 낳는 끔찍한 살육이 반복된다. 나름의 명분으로 전쟁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면서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내모는 가운데, 그들은 결국 폭력을 강요당하거나 폭력의 희생자가 될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폭력의 광기는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으며, 동시에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폭력의 공포에 떨며 고통받고 있다. 물론 모든 전쟁은 언젠가 끝이 올 것이다. 하지만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붕괴한 인간성과 상처받은 영혼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디에서 우리는 희망을 찾을 것이며 인간 존재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것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도네츠크, 가자지구, 텔아비브, 베이루트 등지의 하늘에는 미사일과 드론이 날아다니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3년째 이어지고 있고, 팔레스타인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의 전쟁은 이란, 레바논, 시리아 등등 인접 국가들까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고 있다. 최근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 발발 이후 가자지구 누적 사망자가 최소 4만3000여명에 달하며, 그중 44%가 어린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월스트리트저널 보도(2023년 9월17일)에 의하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양측의 사망자와 부상자 수가 100만명에 이른다. 여기에 더해 최근에는 북한군 1만2000명 이상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전해졌다. 전쟁에서 자행되는 잔혹한 폭력은 이제 전장의 경계를 넘어 일상의 영역까지 침투하고 있다. 축구 경기 응원을 위해 원정에 나섰던 이스라엘 응원단이 집단폭행을 당한 사건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상과 전장이 뒤섞이고 전장의 폭력이 일상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폭력의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우리 주변까지 드리워지고 있다. 더욱이 SNS를 통해 급속도로 확산하는 혐오와 증오의 언어들은 우리를 또 다른 형태의 폭력에 노출되게 한다. 우리는 이처럼 폭력과 혐오가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폭력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가?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이 어둠의 시간에 대응하고 있다. 용병으로 자원해 참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전쟁 반대 시위에 적극 나서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모든 대응이 이처럼 가시적인 것만은 아니다. 최근 동안거에 들어간 스님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폭력에 맞서는 또 다른 방식, 즉 비폭력을 향한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 동안거는 음력 10월15일부터 이듬해 1월15일까지 90일간 이어지는 불교의 전통적 수행이다. 한겨울 추위 속에서 스님들은 산문을 닫고 외부 출입을 삼간 채 오직 수행에만 전념한다. 현대의 동안거는 단순한 불교 전통의 계승을 넘어, 폭력이 만연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전한다. 이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대신, 침묵과 수행으로 저항하는 새로운 길을 보여준다. 동안거 기간 스님들은 기도 수행을 통해 전쟁의 잔혹한 폭력 속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들과 어린이를 비롯한 민간인 희생자들의 영령을 위로한다. 이러한 수행은 겉으론 세상과 단절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더 깊은 차원에서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동안거는 단순한 은둔이 아닌, 더 깊은 차원의 자비와 비폭력을 실천하는 수행인 셈이다.

새벽 3시, 가야산의 깊은 정적을 깨고 울리는 목탁 소리가 해인사 도량 전체에 퍼진다. 안거에 동참한 결제 대중 스님들이 찬 공기를 가르며 하나둘 대적광전 법당에 모여든다. 스님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이른 새벽을 깨우며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인간성을 일깨운다. 그리고 모든 생명이 폭력으로 인한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발원한다. 새벽 종소리가 울려 퍼지듯, 동안거를 시작한 스님들의 깊고 고요한 침묵이 따뜻한 자비가 되어 전장에 가닿기를 손을 모아 간절히 발원해본다.

경향신문

보일 스님 |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보일 스님 |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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