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7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서 대국민담화 및 기자회견을 하며 명태균씨와의 전화통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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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삼 | 언론인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보름 가까이 흘렀건만 그 여진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야당 대표에 대한 검찰의 집요한 기소가 며칠 전 첫 1심 실형 선고로 이어지긴 했지만 지위의 역할과 책임이라는 근본적인 측면에서 윤 대통령이 안긴 충격을 이겨내지는 못한다.
고개 숙여 사과하는 윤 대통령의 모습에 감동한 이들도 적게나마 있는 듯했다. 하지만 두루뭉술한 것이 아닌 구체적인 사과의 의향을 묻자 “딱 집어서 지적해주면 사과하겠다”고 했으니 우롱당했다는 느낌을 받은 국민들이 대다수다. 대신 과거 ‘윤석열의 전화기’를 갖고 ‘윤석열 놀이’를 한 ‘윤석열의 아내’가 있었음을 버젓이 확인시켜줬다. 공천 개입 의혹을 담은 자신의 통화 육성이나 국정농단의 여러 정황 등에 대한 인정은 없고 대선 이후 전화기를 안 바꾼 게 잘못이었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진짜로 얼마 전 윤 대통령은 전화기와 전화번호를 바꾸기로 했다고 밝혔다. 전화기가 큰 죄를 지었다.
대통령에게 철저하게 무시당했다는 모욕감, 앞으로 이렇게 2년 넘도록 살아야 한다는 서글픔과 두려움, 그럼에도 여전히 오불관언하는 대통령의 수준을 재확인한 좌절감과 분노 등 복잡한 감정을 한꺼번에 느낀 그날 이후 주말 광화문·시청 앞으로 몰려나오는 시민들의 숫자가 부쩍 늘었다. 윤 대통령이 스스로 부추긴 결과다.
진짜 두려움이 드는 대목은 따로 있다. 닥쳐오는 엄청난 폭풍우에 대한 철저한 무대비다. 지금 세계는 정치, 경제, 사상 등 모든 분야에서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미국의 대선 결과는 대전환의 구체적인 촉매제다. 대전환기 속 세계 운영 질서는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에서 다극 체제로 변환될 수밖에 없다. 정신 바짝 차리고 준비하지 않으면 국가와 국민이 구한말 참담한 신세로 전락하는 결과를 반복할 것이란 우려까지 든다.
이미 ‘참관단’의 이름으로 우크라이나에 탄약 담당관 등 군인 5명을 파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방어용 무기를 지원한다는 논의도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종전 방식을 논의하겠다 밝히는 마당에 뒤늦게 남의 전쟁에 편입하려는 외교 안보 관련 정책 방향은 전면적 수정이 필요하다. 전쟁 분위기를 한반도로 끌어들이겠다는 의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대북 정책에서 실용적 접근을 하는 미국 새 정부에 의해 자칫 한국이 패싱당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그러는 와중에 윤 대통령이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자와 ‘골프 외교’를 위해 8년 만에 골프채를 잡았다는 기사를 얼핏 보고 내심 반가웠다. 한때 지지율이 10%대까지 넘나들며 탄핵 요구를 받고 있긴 하지만 윤 대통령 역시 한국의 이익 관철을 위해 ‘마지막 2%’까지 꼼꼼히 준비하는 모습이라면 결과를 떠나 얼마나 다행스러운 자세인가.
한데 그것도 아니었다. 미 대선 결과가 나오기 이전인 부천 화재 사망 사건 때도, 평양 무인기 사건 이후 북한이 대남 강경 성명을 내며 군이 비상에 걸린 날도 골프장을 갔다는 의혹이 속속 제기되고 있다.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태풍 전야와 같은 상황에 놓인 국가적 과제를 변명과 거짓 해명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서글픔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해일이 몰려드는 바닷가에서 조개껍데기 주우며 유유자적 산책하는 꼴이다. 전화기가 그렇듯 골프 자체가 무슨 죄가 있겠나. 이 엄중한 시기 절체절명의 공적 과제와 책무를 담당하기에 너무도 부족한 자세를 가진 대통령의 존재 자체가 죄이자 국가적 재앙이다.
어쨌든 꾸역꾸역 5년 임기의 반환점을 돌았다. 줄기차게 야당 대표를 기소해서 설령 감옥에 보내는 데 성공했다 치자. 민심이 돌아서기는커녕 오히려 분노와 저항의 수위만 더욱 치솟을 수밖에 없다. 검찰을 손에 쥐고서 야당과 국민을 윽박지르는 방식, 문제가 드러날 때마다 거짓 해명을 남발하는 식으로는 남은 2년 반을 버텨낼 수 없다.
그래도 백번 양보해서 미국과 러시아, 중국, 북한과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는 치밀한 대책을 만들어낸다면 지금껏 저지른 숱한 실정과 무능, 부패를 어느 정도 상쇄할 만큼의 공을 세웠다고 인정해줄 만하겠다. 그 과정에서는 우리가 국제 외교 질서 속에서 반드시 얻어내야 할 국익의 최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야 한다. 부디 성찰하는 마음으로 새 질서의 변화를 준비하길 바란다. 사실 큰 기대가 없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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