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서하는 신임 판사들 |
(서울=연합뉴스) 최재석 기자 = 부산 지역에서 청년 세입자들에게 전세 사기로 180억원대 피해를 준 50대 임대인에게 징역 15년이 확정됐다. 사기 범죄에 선고할 수 있는 법정 최고형을 대법원이 20일 원심대로 확정한 것이다. 이 임대인은 '무자본 갭투자' 방식으로 원룸 건물 9채 296세대를 사들여 임대사업을 하면서 229명에게 전세보증금 180억원을 받은 뒤 돌려주지 않은 혐의로 기소됐는데 피해자 대부분이 20∼30대의 사회초년생들이었다. 지난 1월 1심 법원은 검찰이 구형한 징역 13년보다 높은 징역 15년을 선고했고, 2심에 이어 이날 대법도 같은 판단을 했다.
대법원 전경 |
이번 판결은 2022년부터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돼온 대규모 전세 사기에 대한 첫 유죄 확정판결이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피해자에게 따뜻한 위로가 됐던 1심 판결이 다시 소환됐다. 1심을 맡았던 부산지법 동부지원 형사1단독 박주영 부장판사(현 부산지법 동부지원장)는 판결문에 이례적으로 피해자들의 탄원서 수십장 내용을 조금씩 인용해 담았다. 그러면서 "피해자들 개개인의 고통은 객관적 수치로 뭉뚱그릴 수 없을 만큼 고유하고 깊고 막대한 것"이라며 "그들의 아픔이야말로 이 사건의 형을 정한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밝히기 위해서"라고 그 이유로 밝혔다.
당시 판결문은 깊은 울림을 줬다. 박 판사는 피해자들이 떼인 전세보증금 중에는 "그 누구보다 근면하고 착한 젊은이들이, 생애 처음 받아 보는 거액의 은행대출금과, 주택 청약부금과, 적금과, 쥐꼬리만 한 급여에서 떼어 낸 월급의 일부와, 커피값과 외식비같이 자잘한 욕망을 꾹꾹 참으며 한 푼 두 푼 모은 비상금과, 그들의 부모가 없는 살림에도 자식의 밝고 희망찬 미래를 기원하며 흔쾌히 보태준 쌈짓돈이, 고스란히 포함돼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은 이 돈을 잃음으로써 "희망찬 인생의 출발선에서 뛰쳐나가 보지도 못했다"고 지적했다.
'정의가 필요하다' |
선고를 끝낸 판사는 피해자들에게도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박 판사는 "탐욕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하는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이 여러분과 같은 선량한 피해자를 만든 것이지 여러분이 결코 무언가 부족해서 이런 피해를 본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 달라"고 했다. '자책하지 말라'는 판사의 위로에 있던 피해자들은 울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박 판사는 법정에서 못다 한 이야기들을 담은 다수의 책을 펴냈고, 다른 여러 '따뜻한' 판결로도 유명하다. 법정에 선 50대 노숙인의 딱한 사정을 위로하며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현금 10만원과 중국 작가 위화의 「인생」이란 책을 선물한 일화도 있다.
「인생」은 사람이 극한의 상황에서도 어떻게 삶을 살아가게 되는지를 잘 그려낸 작품이다. 박 판사는 노숙인이 삶의 작은 용기라고 얻으라는 심정에서 이 책을 건넸을 것이다. AI(인공지능) 시대에 없어질 수 있는 전문직의 하나로 판사도 꼽힌다고 한다. 어쩌면 판례라는 빅데이터를 풍부하게 입력한 AI가 더 공정한 판결을 할 수 있다. 하지만 'AI 판사'는 노숙인에게 「인생」을 권하지는 못할 것이다.
bond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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