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 2년 동안 펜팔을 하던 아이와 학력고사가 끝난 토요일 오후 3시에 신촌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충주에 살고 있던 나는 전날부터 잠을 설쳤고 토요일 아침 일찍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신촌과 이대 앞을 서성거리다가 오후 3시에 신촌역으로 갔다. 신촌역 앞에서 빨간 목도리를 하고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록 그 애는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건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그 자리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겨울이라 그런지 해가 빨리 졌다. 어둑어둑 해 진 신촌역 앞에서 나는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하늘에서 하나둘 눈송이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 딱 한 시간만 더 기다려보자.’ 결국 그 애는 오지 않았고 나는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내고 터미널로 가서 고속버스를 타고 다시 충주로 내려왔다.
고속버스 안에서 그 애에게 선물하려고 했던 시집을 꺼내 읽었는데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는 구절을 읽다가 울어버렸다. ‘그래,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걸 거야. 나는 그 자리에서 기다렸으니까 그걸로 된 거야. 만나지 못했지만 이것도 추억이 되길.’
그 애는 그날 이후 편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었다. 나는 두 번 정도 편지를 더 보냈고 답장이 없길래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요즘 세대는 기다림이라는 말의 정서를 알까? ‘기다림’이라는 게 단순히 ‘시간이 아깝다’는 마음이 아니라 누군가를 온전히 그리워하는 시간이라는 그 정서를.
[이재국·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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