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메쿠의 당근 주스
50만명 구독하는 하루메쿠, 독자 요청 반영해 갖가지 상품 출시
대표 상품인 당근 주스는 재구매율 80% 육박… 비싸도 인기 만점
집요함과 친절함 담아 완성도 높여… 종이 매체가 살아남는 비결
일러스트=이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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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오에도선 가구라자카역의 평일 오후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가구라자카는 옛 도쿄 에도 분위기가 나는 오래된 동네. 그 말처럼 동네 분위기가 느긋했다. 장년층들이 천천히 걷는 골목 사이로 주소를 봐 가며 도착한 곳은 표지 없는 건물 3층에 있었다. 하루메쿠 가구라자카 플래그십 스토어. 일본 ABC 발행 부수 1위 잡지(만화 잡지는 제외)에서 운영하는 매장의 본점인데도 밖에서는 티가 나지 않았다.
하루메쿠를 알게 된 뒤 한번은 가보고 싶었다. 하루메쿠는 일본의 장년층 여성 대상 라이프스타일 잡지다. 서점에는 없고 통신판매만 하는데 정기 구독자는 50만명을 돌파했고 모회사의 연간 매출은 300억엔이 넘었다. 나는 한국의 라이프스타일 잡지 업계에서 에디터로 일해왔다. 나라는 달라도 비슷한 잡지 업계에서 일하며 종이 기반 잡지의 부침을 몸으로 겪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무엇이 달랐을까?
매장에 들어가자 시니어 랜드였다. 시니어 여성의 옷과 액세서리가 가득했다. 남성인 내가 들여다볼 물건은 음식이라 식품 코너로 갔다. 역시 시니어인 매장 직원이 쟁반에 음료를 담아 왔다. 당근 주스였다. ‘이게 그 주스구나’ 싶었다. 암 투병자가 건강 관리를 위해 당근 주스를 마신다는 기사를 내자 ‘집에서 만들어보고 싶다’는 독자 문의가 왔다. 당근 주스 레시피를 소개하자 ‘집에서 만들기 어렵다’는 문의들이 왔다. 그래서 출시한 당근 주스는 재구매율이 80%에 육박한다는 하루메쿠의 대표 상품이 되었다.
식품 코너의 음식에도 공통점이 있었다. 물건마다 이야기가 붙어 있었다. 일본산 정어리와 고등어로 만들었다는 생선 통조림. 시니어 건강에 좋은 칼슘을 간식으로 섭취할 수 있는 멸치 센베이. 무료로 가져갈 수 있는 상품 카탈로그에는 더 자세한 설명이 적혀 있다. 실제로 하루메쿠의 수익은 이들이 직접 제품을 수급하고 관련 정보를 만든 상품 통신판매에서 온다고 한다. 일본 잡지 특유의 집요함과 친절함이 있다. 기술이라고 해도 될 만한 그 특기를 독자 대상 제품 카탈로그에 활용한 셈이다.
매장과 물건을 들여다볼수록 이 매장의 모든 물건이 섬세한 고객 수요에 대한 반응임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제품에 시니어의 상황과 기호가 들어가 있었다. 마시는 차는 건강을 생각했다며 18종의 허브를 담았는데 카페인은 없는 식이다. 실제로 이들은 연간 70회에 가까운 독자 모임을 개최한다고 한다. 독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를 반영한 고품질 상품들을 만든 뒤 그를 모아 둔 매장을 낸 것이다.
이 배경에는 원숙한 일본의 상품 제조 실력도 있다. 식품을 발주해 제품화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당근 주스나 과자 같은 건 한국에서도 발주하면 된다. 다만 일본 식품 제조업의 완성도는 대단하다. 여전히 한국의 식품 기업은 일본을 상당 부분 참고한다. 흔한 상품을 높은 품질로 만들 역량이 있다. 제조업의 프리미엄화는 선진국의 공통점이자 지향점이기도 하다. 인건비 상승분만큼 생산물의 품질이 높아지는 건 당연하다. 하루메쿠에서 판매하는 식품 가격도 일반 수퍼마켓의 동종 식품 가격보다 훨씬 비싸다. 그런데 하루메쿠는 생활 정보를 편집하고 생산하는 잡지다. 정제된 상품 정보를 통해 물건 가격을 설득시킬 역량이 있다. 그들의 역량은 성공으로 증명되었다. 매장이 그 증거였다.
잡지 업계의 고전은 세계적 현상이라 하루메쿠가 더욱 인상적이었다. 가서 보니 이들의 성공 비결은 간단했다. 독자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그들이 원하는 걸 높은 품질로 만들었다. 그게 선순환하며 하루메쿠는 21세기 미디어 시장에서 살아남았다. 일본의 역량을 활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일본의 식품 제조 역량은 세계적이다. 일본 잡지의 정보 편집 역량도 발군이다. 하루메쿠는 이 두 역량을 조합해 2000만명 이상의 일본 시니어 여성 시장을 파고들었다. 그리 보면 성공은 예견된 듯도 하다. 허나 비결이 간단할 뿐 이를 구현하는 역량을 갖추는 건 다른 이야기다.
점원은 한국 드라마의 팬이라며 배우 안보현과 공유가 부산 사람인 것까지 알았다. 내가 이것저것 사는 걸 보더니 “한국에는 이런 잡지가 없나요?”라고 물었다. 내가 아는 한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럼 만들어 보세요”라고 말하며 점원은 호호호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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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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