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26일 오후 전남 해남군 산이면 초송리 밭에서 정영선씨(왼쪽)가 유실됐던 배추밭에 모종을 심은 뒤 영양제를 주고 있다. 정대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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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하 | 전국팀 선임기자
오랜만에 배추밭에 갈 일이 생겼다. 두달 전께 폭우 때문이었다. 김장용 가을배추 주산지인 해남에 하루 동안 300㎜가 넘는 비가 내렸다. 며칠 뒤 “해남 배추밭이 쑥대밭이 됐다”는 방송 뉴스를 봤다. 해남 배추 재배 면적은 전국의 26.2%를 차지한다. 해남 배추밭이 무너지면 가을배추 값이 급등해 ‘금배추’가 된다. ‘김장 대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해남군청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폭우 피해를 입은 배추 재배 농민을 소개받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가 해남군청 한 공무원한테 “배추 농가에서 언론 취재를 꺼린다”는 말을 듣고,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았다. 30년 배추 농사를 해온 한 농민의 하소연이 절절했다. “폭우 피해 보도가 더 나가면 큰일이랑깨요. 비는 왔지만 바람이 크게 불지 않아 모종을 다시 보식하면 살려낼 수 있어요. 그런데 폭우 피해를 빌미로 중국산 배추를 수입하면 배추 농사 망해부러.”
현장의 걱정을 그대로 전달하겠다고 설득해 피해 농민을 인터뷰했다. 배추밭에서 만난 농민들은 김장 시기를 일주일 정도 늦추면 ‘대란’은 없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중국 배추 수입 소식에 걱정’하는 내용(한겨레 9월27일치 12면)을 담아 보도했다. 김장을 앞두고 배추값이 잡히지 않으면 오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최근 배추값이 평년보다 더 낮은 값으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씁쓸했다.
올여름 배추값이 뛰었던 것은 여름배추를 생산하는 중부 고랭지에서 고온으로 수확이 신통치 않아서였다. 그런데도 정부는 배추값을 잡겠다며 중국산 배추를 수입하기로 했다. 농민들의 처방은 달랐다. “정부가 중부 지방에서 4~5월 출하되는 봄배추를 더 많이 수매해 비축해뒀다가 여름배추 작황이 안 좋을 때 풀면 되지요.”(해남 농민 이무진씨) 만약 여름배추 작황이 좋으면 비축용 봄배추를 폐기하는 것이 배추를 수입하는 것보다 낫다.
배추를 수입하면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손해다. 외국산 배추가 들어오더라도 해남의 가을배추는 김장용으로 팔린다. 문제는 민간업자들이 신청한 배추가 올겨울 들어오면 겨울배추가 무너진다는 점이다. 겨울배추가 폭락하면 봄배추뿐 아니라 7~9월 여름배추도 ‘금배추’가 된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 지역별로 생산되는 배추 가격을 적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국내 배추를 활용하는 게 중요하다.
농산물 수입은 농수축산물 수입·유통기업들과 식품제조업자들 배만 불린다. 2021년부터 3년간 관세율을 낮춰 부과하는 ‘할당관세’를 적용해 1조7천억원어치의 농식품을 수입했다. 하지만 농산물 수입으로 소비자 가격이 내려가는 것도 아니다. 김현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0개 민간 품목의 경우 할당관세를 적용했지만 9월 기준 가격이 내린 품목은 양파, 대파 등 3가지뿐”이라고 지적했다.
농산물 가격 상승의 주된 원인은 기후변화 탓이다. 폭우·폭염 등 기상 현상이 심각한 피해를 부르고 있다. 기후변화로 사과 작황이 좋지 않았는데도 언론에선 ‘금사과’만 이야기한다. 사과값이 올랐을 때도 수확량이 적었던 농가에선 돈을 벌 수 없는 구조인데도, ‘금사과’가 물가 상승의 주범인 것처럼 프레임을 씌운다.
기후위기는 식량위기를 부른다. 한때 농업 강국이었던 필리핀은 ‘1960년대 2600만명이던 인구가 2020년에 1억1천만명까지 늘어나는 동안 쌀 가격 안정에 실패해 2008년 정권까지 위태로워졌다’.(이주량 ‘당신이 모르는 진짜 농업 경제 이야기’) 코로나19도 식량 주권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식량의 90%를 수입에 의존하던 싱가포르는 2019년부터 수입처 다변화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농업 문제는 국민적인 합의가 필요하다. 쌀이나 배추 등 농산물을 단순하게 농민들의 소득 창출 수단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선진국에선 농업 예산을 줄이지 않고 농민들에게 직접 지원하고 있다. 농민들의 삶을 보장하는 정책을 만드는 게 국가의 역할이다.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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