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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 (수)

[임종주의 시선] ‘조용한 쇄신’은 애당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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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임종주 정치에디터




챗GPT를 위시한 생성형 인공지능(AI)은 법조·의료·금융계를 비롯해 세상사 거의 모든 분야에서 사람이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척척 해낸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큰 걸림돌이 있는데, 바로 AI가 어떻게 경이로운 결정을 내리는지 속 시원히 알 수 없는 ‘블랙박스 문제(black box problem)’다.

재판에서 패소하거나 대출을 신청했다가 일언지하에 퇴짜를 맞았는데 그 연유를 도통 알 길이 없다면, 또 처방전을 받기는 받았는데 왜 그 약인지 납득할만한 설명이 없다면 선뜻 수긍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정차해야 하는데도 서지 않고 질주해 사고를 냈는데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다면 더는 믿고 쓸 수 없을 것이다. AI는 전광석화처럼 빠르고 자신만만하게 답을 내놓지만 왜 그런지 합리적인 판단 근거나 논리는 깜깜이 속이다. 신뢰와 공정, 투명성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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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 로고.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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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운영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고 하듯 핵심 축인 인사가 어떻게 결정됐는지 베일에 싸여 있다면, 한술 더 떠 그 과정에서 미심쩍은 향내마저 풍긴다면 누구도 고개를 끄덕이기란 쉽지 않다. 마찰과 잡음이 커지는데도 난맥상이 고질병처럼 되풀이된다면 민심은 등을 돌리게 되고, 국정 운영에는 위기가 스며든다.

지난해 3월 김일범 의전비서관·이문희 외교비서관 연쇄 교체에 이은 김성한 국가안보실장 전격 사퇴는 결정적 경고음이었다. 윤석열 대통령 미국 국빈방문을 한 달 앞두고 벌어진 석연찮은 경질 사태를 두고 ‘김건희 여사 라인’과의 충돌설이 정치권 안팎에 파다했다. 1년여가 흘러 올해 4·10 총선 직후엔 ‘박영선 국무총리-양정철 대통령비서실장 기용설’ 보도를 놓고 당시 이관섭 비서실장이 부인하자 ‘김 여사 라인’ 비서관이 대놓고 뒤집는 황당한 일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윤 대통령과 김 여사를 동시에 난장으로 끌고 들어간 정치 브로커 명태균씨 공천 개입 의혹은 민초들의 응축된 원성에 불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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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7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브리핑실에서 대국민담화 및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대통령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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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와 기자회견 무대에서 자신과 김 여사의 올바르지 못했던 처신에 고개를 숙인 지 2주가 흘렀다. 윤 대통령은 사과와 함께 “쇄신에 쇄신을 기하겠다”는 약속도 했었다. 제2부속실이 바로 출범했고, 김 여사는 윤 대통령의 이번 남미 순방에 동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외에 이렇다 할 쇄신 움직임은 아직 없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 대응과 해외 순방 일정, 새해 예산안 통과 때문이라는 대통령실의 설명뿐이다. 그 어디에서도 절박함은 읽히지 않는다.

AI 블랙박스 문제는 그 속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 몇 달 전 스타트업 앤스로픽이 AI의 ‘뇌 지도’ 일부를 파악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언제가 됐든 해결만 된다면 불신은 그만큼 상쇄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은 기계처럼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믿음의 접시에 일단 금이 가면 서운함과 실망감, 배신감을 넘어 때론 미움의 감정까지 한꺼번에 밀려들어 불신의 상승 작용을 일으킨다. 문제의 근원을 찾아 해소한다고 해서 신뢰가 곧바로 원상회복 되지 않는다.



윤 “쇄신” 약속, 후속 조치 '감감'

지지율 3주 만에 20%, 부정 71%

담화와 기자회견 효과 덕인지 몰라도 윤 대통령 국정 운영 지지율(한국갤럽, 15일)은 3주 만에 10%대를 벗어났다. 그렇다고 해도 겨우 20% 턱걸이다. 여전히 부정평가가 71%에 달한다. 싸늘한 민심에 온기가 돌게 하려면 아직도 갈 길이 까마득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사법리스크 심화에 따른 정치적 반사 이익 정도로 벌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민심을 다독이는 길은 변화와 쇄신 말고는 달리 방도가 있을 리 없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진이 올해 상반기 AI CEO와 인간 CEO의 능력을 비교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그랬더니 AI가 탁월한 능력을 과시하며 전략적 의사 결정에서 인간을 능가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블랙스완 이벤트, 즉 예측 불가한 사건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직관력과 예지력은 사람을 쫓아가지 못했다. 결국 AI CEO가 먼저 해고됐다.



신속·과감하게 쇄신 실행 나설 때



후반기에 접어든 국정 운영에 전면적인 쇄신이 필요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 정도다. 윤 대통령이라고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관건은 실행력이다. 제아무리 AI라고 해도 갖지 못한 인간의 출중한 위기관리 능력은, 그러나 결행하지 못하면 별 소용이 없다. 결정의 순간에 인간 CEO가 머뭇거렸다면 AI CEO보다 먼저 해고됐을 것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하다. 쇄신은 본래 쾌도난마식 결단과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한다. 굼뜨고 조용한 쇄신이란 없다.

임종주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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