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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 (수)

[노트북을 열며] 일상 탄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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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전수진 투데이·피플 팀장


“야, 그냥 탄핵해버려.” 귀를 의심했다. 지난 일요일 한 카페 옆자리 10대 학생끼리 나눈 대화의 일부. 엿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온 대화의 맥락상 탄핵의 대상은 담임교사였다. 절반은 비속어인 이들의 대화에 탄알 탄(彈), 꾸짖을 핵(劾)이라는 한자로 구성된 이 단어가 들릴 줄이야. 한때는 신문 1면에 고딕 볼드체로 무시무시하게 인쇄됐던 이 단어가 이젠 일상어로 자리 잡았다는 방증일까.

비속어를 쓴다고 학생들을 나무랄 것도 없다. 정치하는 이들부터가 누가누가 더 거칠게 표현을 하는가를 두고 경쟁 중이다. 국민을 대표하는 현직 의원이 같은 당의 반대파를 겨냥해 “죽인다”는 표현을 서슴없이 하는 게 현실이니까. 일상이 탄핵당한 느낌에 뒷맛이 쓰다. 대통령은 지난 15일 생방송 기자회견에서 “국정농단”이란 단어를 두고 “국어사전 재정의”를 언급했지만, 외려 재정의가 필요한 건 “탄핵”이라는 단어 아닐까 싶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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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대국민담화 중인 윤석열 대통령(왼쪽)과 19일 국회 행사 참석 중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사진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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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떠오르는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 불후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의 그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문학동네 번역본). 이 문장의 주어를 “가정”에서 “국가”로 바꾸어도 이상하지 않은 때에 우린 살고 있다. 탄핵이며 특검이라는 단어들은 이제 별 임팩트가 없다. 최고 권력자는 생방송 마이크를 잡으며 “악마화”란 표현을 쓰고, 그 차기를 노리는 유력 정치인은 본인 이름 석 자와 함께 “결코 죽지 않는다”라고 절규한다. 정치 스펙트럼의 어디에 있든 모두가 나름나름 불행하다.

그나마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불행하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인가. 하지만, 정신 차리자. 세상 걱정만 하다 보면 끝이 없다. 최근 인터뷰했던 마케팅 전문가이자,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폴린 브라운은 이렇게 얘기했다. “세상이 괴로울수록 개인을 지탱하는 건 일상의 아름다움이다.” 인터뷰하던 시각, 마침 백악관의 다음 주인 결과가 나왔다. 낙담하던 그는 이내 미소 지었다. “혼돈의 시대일수록 아름다움을 지켜내는 게 중요하니, 내 일이 더 중요해지겠다”면서다.

나라가 어지러울수록 개인은 단단해져야 한다. 고만고만한 행복이 영원한 사치인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 아름다움까지는 어렵더라도 평정심이라도 지키려면 결국 내 중심은 내가 잡아야 하겠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건 어차피 항상 힘든 업 아니었나. 그래도 걱정은 된다. 10대 친구들끼리 “엄마·아빠 탄핵해버리지 뭐”라는 세상이 오진 않을지. 일상에 스민 탄핵은 참을 수 없이 가볍다.

전수진 투데이·피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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