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19 (화)

이슈 미술의 세계

백남순 가족사진 속 ‘낙원’…제작시기 확인됐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중앙일보

백남순은 ‘낙원’의 가장자리에 영문 서명을 했고, 표구처럼 무늬도 그려 넣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건희 컬렉션 ‘낙원’(1936)의 완성 당시 찍은 화가 백남순(1904~94)의 가족사진이 발견됐다. 8폭 병풍 ‘낙원’ 앞에서 찍은 사진 속에는 ‘낙원’을 그린 백남순과 그의 남편인 예일대 미대 출신 화가 임용련(1901~50), 그리고 이들의 딸 테레사 순애(1931~2022), 캐서린 순(1932~2018), 메리 순명(1935~) 등이 있다.

처음으로 공개되는 이 사진은 미국에 있는 백남순의 유족이 중앙일보에 보내왔다. 사진 속 임순애의 딸이자 백남순의 손녀 펠리시아 커밍스는 “할머니가 안고 계신 셋째딸 순명이 생후 6개월 이상 돌 정도 나이여서 ‘낙원’의 제작 시기는 1936년, 그림 완성 후 친구의 결혼 선물로 보내기 전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로써 ‘낙원’의 제작 시기를 1936년으로 특정할 수 있게 됐다. 이는 “평북 정주시절 셋째 딸을 출산한 이듬해 제작한 작품”이라고 생전의 작가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이야기와도 일치한다.

백남순은 한국 최초로 파리에 유학한 여성 화가이자, 파리의 살롱 데 튈르리, 살롱 도톤에 출품한 최초의 한국 여성 화가다. 1930년 파리에서 임용련과 결혼했다. 3·1운동에 가담해 수배 중 중국으로 피신한 임용련은 상해임시정부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를 거쳐 예일대 미대를 수석 졸업, 유럽미술연구 장학생으로 파리에 갔다.

중앙일보

‘낙원’ 앞에서 찍은 백남순(왼쪽 셋째)의 가족사진. [사진 유족]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후 귀국해 평북 정주 오산학교에서 이중섭·문학수 등을 가르치던 이들은 해방 후 서울로 왔다. 미군정에서 일하던 임용련은 6·25 때 공산군에 처형됐다. 정주 고읍역 창고에 모아뒀던 두 사람의 그림은 폭격으로 소실됐다. 7남매를 데리고 부산으로 피란 간 백남순은 서울대 미대 강사로 지내다가 성심공민학교를 설립해 전쟁고아 구호와 빈민교육에 헌신했다.

‘낙원’은 캔버스로 짠 8폭 병풍에 그린 유화다. 폭포수나 험산 준령의 표현법은 산수화를, 누드의 남녀나 서양식 집, 야자수는 이상향을 그린 서양 풍경화를 닮았다. 병풍화의 관례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보게 그린 이 그림의 왼쪽 위에 백남순은 ‘N.S.Paik’이라고 서명했고, 표구를 대신해 테두리도 직접 그려 넣었다. ‘낙원’은 친구의 결혼선물로 완도에 보낸 덕에 살아남았다.

1964년 미국에 이민 간 뒤 잊혀졌던 백남순은 1981년 『계간미술』(지금의 월간미술) 인터뷰로 세상에 알려졌고, 이를 계기로 친구가 간직하던 ‘낙원’도 발견됐다. 뉴욕의 아파트에서 혼자 지내며 “오늘은 꼭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그림 그리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는 백남순이다.

유족들은 백남순의 미국 시절 그림인 ‘사과’(1976), ‘단풍과 못’(1991), ‘리듬’(1986)의 이미지도 보내왔다. 펠리시아는 “할머니는 뛰어난 분이셨다. 강하고 영리했다. 거의 무일푼으로 일곱 아이를 외국에 보내 교육했다”고 돌아봤다.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