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에서는 더 이상 고추 농사짓기 힘들겠다는 말이 도는데, 한쪽에서는 또 그럭저럭 잘된다고 하고, 심지어는 같은 마을에서도 특정 작물의 잘되고 못 되고가 갈린다는 말도 들려온다. 경향신문 11월1일자에 실린 김해자 시인의 전언에 의하면, 제주 앞바다에서는 “해초가 단계적으로 줄어드는 것보다 전멸 아니면 과잉인” 사태가 반복되고 있다고 한다. 즉 한 해는 톳만, 또 한 해는 미역만 난다는 이야기다. 농약을 많이 치지 않았는데 밭에 사는 벌레가 안 보이거나 흙이 이상하다는 말도 들린다. 이쯤 되면 한마디로 말해서 그간의 조화가 깨졌다는 판단밖에 서질 않는다. 도시 문명 속에서 사는 인간들과는 달리 기후가 변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을 맨몸으로 살아야 하는 미생물들, 곤충들, 그것들의 터전이 되는 땅에서는 기후학자들이 말하는 티핑포인트(tipping point)가 이미 지났는지도 모른다.
자연의 조화가 깨지면 오는 것
기후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식량위기가 닥칠 것이라는 경고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먹거리는 땅에서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땅의 위기를 막으려 하기보다는 과학기술의 힘을 믿는 미신이 광범위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타난 게 스마트팜이다. 언론과 정치인들은 땅이 아니라 수경재배를 통해 지속적인 고소득을 올릴 수 있고, 심지어 인구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스마트팜에 투입되는 자본이 은행권에서 흘러들어오며, 아무리 자치단체의 지원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그게 빚이라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또 스마트팜이 쓰는 에너지가 결국 많은 탄소 발자국을 남긴다는 것도 은폐한다.
그러는 사이에 기후는 하루가 다르게 변했으며, 급기야 9월 한 달 내내 장마철 같은 고온다습한 날씨가 계속됐고, 배추가 다 녹아버리는(실제 배추 농사를 짓던 농부의 말이다) 바람에 배춧값이 천정부지로 오른 기억이 엊그제다. 곧이어 남도 지방의 들녘을 벼멸구가 덮쳤고 첫눈이 내려야 할 11월 중순에 한낮의 기온이 20도가 넘는 사태에 이르렀다. 박절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은 도착된 언어일지 모른다. 첫눈이 와야 할 때가 됐건만 첫눈을 말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만 첫눈을 망각해서일까.
‘와야 할 첫눈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삭막한 것인가’라고 묻는 것은 우리 모두 낭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감상적인 넋두리가 아니다. 가을이 끝나야 하는데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첫눈 대신 ‘흉한 것’이 목전에 와 있다는 뜻은 아닐까? 그 ‘흉한 것’이 무엇인지는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어쩐지 무시무시할 것만 같다. 아직 우리는 자연의 조화가 깨지면 나타날 것들에 대한 경험이 없다. 몇 가지 예측되는 것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측일 따름이다. 아니면 그 ‘흉한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데 불안에 떨며 살기 싫어 애써 무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의 삶 자체도 어지러우니 이미 와 있는 ‘흉한 것’에 그냥 눈을 감는 게 인지상정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지상정이라는 것도 자연의 변화를 긍정하는 마음 자세이지 인간사에 대한 자포자기의 심정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어떻게든 터져나올 인간의 불안
그런데 들키고 싶지 않은 그 불안이 다른 데로 터져 나온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살려고 하는 본능과 마음은 결국 어떻게든 제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인데 장애물이 있으면 비틀린 채로라도 나타나는 법인데 그게 혹 차별과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라면 어쩔 것인가. 그게 검게 그을린 언어와 각자위심(各自爲心)이라면 어쩔 것인가. 그게 파괴와 죽임의 충동이라면 또 어쩔 것인가. 오늘날 어지럽게 펼쳐지는 이런 현상들은 최소한 생태 공동체의 조화가 깨지면서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인간의 마음에도 그 거처가 있는 법인데 그 거처가 파괴적으로 변한다면 인간의 마음도 크게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그런데도 세상은 온통 주가와 비트코인 이야기뿐이다. “저그 땅 그 순한 짐승 한 마리/ 지키지 못한 것들이/ 달나라 별나라” 가는 이야기만 한다.(김용만, <흘러가는 기쁨>)
황규관 시인 |
황규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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