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해외자본 매각 우려 여전
김병주 회장, 주주에 中 투자 확대 언급
역외 탈세 의혹에 국감 증인 신청도
약 40조원 규모 기금을 운용하는 동북아 최대규모 사모펀드(PE) MBK파트너스 행보를 놓고 재계에선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한국앤컴퍼니에 이어 올해 9월 영풍·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 참여하면서 기업의 자본적 파트너에 집중한다는 국내 사모펀드의 '암묵의 룰'을 깨고 적대적 M&A(인수합병)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행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상속세율 등으로 인해 2·3세 오너 지분 구조가 취약한 대기업집단은 국내 PE가 더 이상 아군이 아니라는 충격에 빠지며 제2의 고려아연 사태를 우려하고 있다.
◆우호적 M&A→적대적 M&A로 방향 전환···연기금·공제회 이탈
17일 업계에 따르면 MBK·영풍 연합은 고려아연 공개매수를 위해 만든 특수목적회사(SPC) 한국기업투자홀딩스를 통해 고려아연 지분 1.36%(28만2366주)를 장내 매수했다고 지난 11일 공시했다. 이로써 MBK·영풍의 고려아연 지분은 기존 38.47%에서 39.83%로 늘었고, MBK·영풍 연합과 고려아연 간 경영권 분쟁은 한층 더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게 적대적 M&A에 집중하는 MBK 행보를 놓고 IB 업계에선 이례적이라고 평가한다. 그동안 국내 PE는 우호적 M&A를 기반으로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에 처한 대기업집단의 자본 파트너 역할을 해왔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국내 PE는 주로 연기금, 공제회 등 국내 기관투자자에서 출자를 받는 만큼 국민 여론이 악화되는 적대적 M&A에 나서기 어렵다"며 "반면 MBK 출자자(LP)들은 대부분 해외 투자자라 국내 대기업을 대상으로 한 적대적 M&A에 나설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MBK 출자자는 중국, 캐나다 등 다양한 국가 연기금과 금융기관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한 적대적 M&A에 반감을 가진 국내 연기금, 공제회가 MBK에서 이탈하는 모습도 감지되고 있다. 과학기술공제회는 지난 10월 PE 대형 부문 위탁운용사에서 쇼트리스트(적격후보)에 포함됐던 MBK를 제외했다. 김태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도 지난달 18일 국감에 출석해 “국민연금 자금이 우호적인 M&A를 통한 기업 재무구조 개선 작업이 아니라 적대적 M&A를 통한 경영권 쟁탈에 쓰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만약 국내 연기금과 공제회의 MBK 이탈이 지속된다면 해외 연기금과 금융기관에 대한 의존도가 한층 커지면서 국부 유출에 대한 논란을 피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향후 국내 대기업과 MBK 간 우호적 M&A도 함께 급감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中 투자전략 강조한 김병주 MBK 회장···여전한 해외 자본 매각 우려
고려아연 경영권 인수 후 차익 실현(엑시트)에 대한 논란도 커질 전망이다. 만약 MBK가 콜옵션(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해 고려아연 지분 약 20%를 확보한다면 그 지분 가치는 15일 종가 기준으로 약 4조2000억원에 달한다. 성과 보수를 얻기 위해 이를 약 6.3조원에 매각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이 돈을 일시에 투입해 고려아연 지분을 인수할 수 있는 국내 대기업집단은 거의 없다. 가장 유력한 후보인 현대차·한화그룹은 이미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의 우호 지분으로 참여하고 있는 상태다.
이에 업계에선 비철금속 세계 1위 기업인 고려아연이 해외로 매각될 가능성을 놓고 우려하고 있다. 국내 중공업·배터리 산업의 중간고리인 고려아연이 해외로 매각되면 한국 전체 산업 경쟁력 악화가 우려된다. 이러한 우려를 놓고 김광일 MBK 부회장은 지난달 "고려아연 경영권을 획득해도 절대 중국에 매각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는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는 발언일 뿐이다. 펀드 만기가 도래한 상황에서 국내 인수자가 없으면 MBK로서는 해외 매각을 충분히 검토할 수 있다.
지난 4월 김병주 MBK 회장이 투자자들에게 보낸 연례 서한에서 중국 시장에 대한 지속적인 신뢰와 그에 따른 투자 전략을 강조한 점도 불안 요소다. 서한에 따르면 MBK는 중국 경제성장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중국 내 사업이 장기적인 투자 이익을 창출할 것으로 보고 있다. 장기적 관점에서 중국 시장에 대한 투자를 확대할 계획인 만큼 고려아연이 중국 자본에 팔려나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산업계에선 거금을 들여 고려아연 지분을 인수할 만한 유력한 후보로 호남운능, 선전다이나노닉, 화유코발트 등 미국 IRA법 우회를 노리는 중국 주요 양극재 기업을 꼽고 있다. 이와 관련해 라피 아밋(Raffi Amit)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교수는 국내 언론과 인터뷰에서 "MBK의 LP에는 중국 대형 국부펀드가 포함되어 있어 MBK가 고려아연 경영권을 매각한다면 국가 안보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MBK가 고려아연을 지배하면 단기적으로 회사 규모 축소와 비용 절감을 불러오고 3~5년 이내에 최고 금액을 제시하는 곳에 고려아연 지분을 매각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MBK 관련 여론이 악화되면서 한국계 미국인인 김 회장이 국세청에서 수백억 원을 추징당했다는 의혹이 올해 국정감사에서 다시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2022년 MBK는 역외탈세 혐의로 2년간 세무조사를 받은 끝에 일정량의 세금을 추징당했다. 이를 두고 김광일 MBK 부회장은 "회사가 역외탈세로 추징당한 적은 없다"며 "한국법인이 있기에 정기적으로 세무조사를 받은 후 법인이 추징당한 것은 맞다"고 설명했다.
국회는 김 회장에게 국감 증인으로 출석을 요청했지만 김 회장은 업무상 중요한 해외 출장이 예정돼 있다며 불출석 의사를 밝혔다. 이와 관련해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시민 단체의 주장을 인용해 "김 회장은 미국 시민권자로 소득세를 전혀 내지 않아서 역외탈세 혐의로 고발당하기도 했다"며 "국내에서 돈 벌고 미국에 세금을 낸 의혹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은 지난 4일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에서 열린 '김병주도서관' 착공 행사에 참석해 언론과 만나 "지배구조와 주주가치 때문"이라고 고려아연 경영권 확보에 나선 이유를 처음으로 설명한 바 있다.
아주경제=강일용 기자 zero@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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