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적 동의 없이 원전 카르텔들이 모여 결성한 사업은 충분한 논의 없이 시작할 수 없으므로 전액 삭감이 필요하다.”
지난 14일 열린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 예산소위에서 야당 의원들이 원자력 연구개발(R&D) 사업 예산을 심의하며 나온 말이다. 야당 의원들이 문제 삼은 이 사업은 발전용 소듐냉각고속로(SFR) 설계를 위해 70억원을 투자하는 사업이다.
SFR은 냉각제로 소듐(나트륨)을 사용하는 차세대 원전 기술이다. 액체 나트륨은 물보다 끓는점이 높아 사고가 나도 과열될 가능성이 작다. 액체 상태의 소금이 배터리처럼 열 저장도 할 수 있다. SFR은 이미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마이크로스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가 세운 테라파워는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의 전력회사 퍼시피코프와 SFR 방식의 소형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개발하고 있다.
야당은 SFR 사업을 필두로 많은 원자력 R&D 사업에 대해 예산 삭감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용후 핵연료 처리나 차세대 원전 연구가 모두 정쟁으로 좌초 위기에 처해 있다. 원자력 분야 R&D는 지난 문재인 정부 때 탈원전 기조로 크게 힘을 잃었다. 원자력 분야의 한 연구자는 “지난 정부에서 원자력 생태계는 다시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됐다”고 전했다. 연구자들은 그런 일이 또 일어날까 우려했다.
한국은 한때 최고 수준의 원자력 기술을 갖춘 나라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차세대 원전으로 넘어가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탈원전 기조로 성장 동력이 사라졌다. 윤석열 정부 들어 다시 원전 건설 허가가 이뤄지고, 원전 수출에도 성공하면서 원자력 산업계와 연구계가 다시 한 번 힘을 내고 있다. 그런데 난데없는 야당의 카르텔 주장에 또다시 불안감에 휩싸였다.
야당 의원들은 차세대 원전 기술에 대한 투자와 원자력 카르텔이 무슨 상관인지 제대로 설명도 못하고 있다. 반대를 위한 반대에 다시 한 번 원자력 R&D가 휘청하면, 원전 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연구용 원자로인 하나로를 비롯해 원자력 연구 시설에서는 반도체, 배터리, 우주 등 첨단 산업 기술 연구도 한창이다. 국내 산업 경쟁력을 갖추는 데 원자력에서 파생된 기술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원자력 R&D의 좌초는 이런 산업 경쟁력에도 문제가 생긴다는 걸 의미한다.
한번 파괴된 연구 생태계를 복구하려면 얼마나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지 정치권 모두가 알고 있다. 야당 의원들은 올해 정부의 R&D 예산 삭감을 비판하면서 “한 번 무너진 연구 생태계는 다음 해에 예산을 늘린다고 회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부디 원자력 R&D도 같은 잣대로 바라보기를 바란다.
이병철 기자(alwaysam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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