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민교 교수(서울대 행정대학원) |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제국(국가), 자본주의(시장), 과학기술의 상호작용이 인류 역사에 진보와 풍요, 그리고 퇴보와 파괴를 동시에 가져왔다고 강조한다. 이 상호작용은 단일 사건이 아닌 장기적 변화의 연쇄 속에서 작동해 왔으며, 약 1만년 전 농업혁명에서부터 시작해 근대 과학혁명, 산업혁명, 제국주의 시대를 걸쳐 문명사를 견인해 왔다. 농업혁명은 사회의 조직화를 촉진해 경제와 정치 관계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었고, 과학혁명은 세계에 관한 새로운 탐구 방식과 발견을 촉진하여 대항해 시대와 산업혁명의 길을 열었다. 이는 19세기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와 패권 경쟁으로 이어져 20세기 세계 질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025년을 목전에 둔 오늘, 국가, 시장, 기술 간의 상호작용은 서로를 밀어내는 힘보다 끌어당기는 힘이 더욱 강력해지면서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 다만 21세기의 제국은 과거 식민지 제국처럼 직접적인 수탈이 아닌 경제 및 기술 패권을 통한 간접 방식으로 형성되고 있으며, 이는 특히 미중 패권 경쟁에서 두드러진다. 미중 경쟁은 경제적 무역 전쟁을 넘어 기술력과 안보를 둘러싼 전방위적인 갈등으로 확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반도체는 국가 안보와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부상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 4년 동안 반도체 기술을 두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 정책을 계승하면서도 더욱 구체적인 조처를 해왔다. 미국의 공격적이고 자국 중심의 반도체 기술 전략은 '트럼프 없는 트럼프 정부'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바이든 정부는 이에 개의치 않았다. 대표적으로 수출관리규정(EAR)을 통해 미국 기업이나 미국인이 중국으로 고성능 반도체와 제조 설비를 수출하는 행위를 제한하고 있으며, 특히 엔비디아의 고성능 GPU 같은 슈퍼컴퓨터용 반도체의 수출 제한은 인공지능, 고속 계산 등의 분야에서 중국의 기술 성장을 견제하는 효과적 수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조치는 중국에 진출한 국내 반도체 기업에도 어려움을 초래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 내 생산에 대해 미국 정부로부터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로 예외를 인정받았지만, 제한적인 생산과 수출 제약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한 미국의 수출규제는 중국의 구형 레거시 반도체 자급 정책을 부추겨 우리 기업들의 대중 반도체 수출 감소를 초래하고 있다. 이는 현대의 '제국 경쟁'이 기술 자립과 시장 지배력 확보를 둘러싸고 더욱 격화되는 와중에 그간 안정적으로 작동하던 '글로벌 공급망'이 미국 중심의 '지역 거점 공급망' 체제로 재편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내년 초 트럼프 집권 2기가 시작되면 기술 패권을 둘러싼 미중 갈등은 더 심해질 것이다. 유럽연합, 일본, 대만 등 주요국도 앞다퉈 최첨단 기술을 핵심 전략 자산으로 삼는 경향은 제국이 더 강한 중력으로 시장과 기술을 빨아들이는 현상을 가속할 것이다. 우리도 이런 변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들 국가의 리쇼어링(reshoring),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얼라이쇼어링(allyshoring) 전략에 더욱 능동적으로 대응할 시점이다.
구민교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
ⓒ 머니투데이 & mt.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