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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4 (목)

[경향의 눈]한동훈, 간 보다 흘러간 11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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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지난 7일 기자회견은 ‘어찌 됐든 사과’만 남았다. 윤 대통령은 남은 임기를 ‘정신 차리고 잘해보려는구나’라는 일말의 기대조차 주지 않았다. 실패를 향한 폭주 선언이었다. 친한동훈계 인사들의 입에선 “망했다” “안 하니만 못했다”는 탄식이 나왔다. 윤 대통령에게 “담화는 반드시 국민 눈높이에 맞아야 한다”고 했던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오전 당대표실을 나간 뒤 종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한 대표도 당혹스럽고 실망했을 거라고 봤던 날이다.

윤 대통령이 2시간20분 동안 쏟아낸 4만4000여자 공식 속기록 어디에도 한 대표 요구가 제대로 반영됐다는 표현은 없었다. 오독 불가였다. 윤 대통령은 또다시 한 대표를 패싱했고, 수모를 줬다. 그런데 한 대표는 이튿날 낸 입장문에서 “대통령께서 현 상황에 대해 사과하고 인적 쇄신, 김건희 여사 활동 중단, 조건 없는 특별감찰관 임명을 국민들께 약속했다”고 했다. 나아가 무슨 쇄신 의지가 있었다는 건지 “실천을 위해 당은 민심을 더 따르겠다”고 했다. 이런 반전이 없다.

한 대표는 국민 대신 김 여사를 선택한 윤 대통령을 선택한 게 분명했다. 그가 강조한 건강한 당정관계는 회견 후 당정일체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윤 대통령이 달라져야 한다고 했는데, 한 대표가 태세 전환을 했다. 흡사 윤석열 정부 ‘황태자’였던 법무장관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윤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한 대표를 비대위원장으로 보낼 때 원했던 모습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한 대표는 여당 리더가 될 때 국민 눈높이를 얘기했다. 그러나 실상은 11개월간 윤 대통령과 민심 사이에서 눈치 보면서, 두더지 게임을 하는 듯했다. 머리를 내밀었다 용산의 망치를 맞으면 쑥 들어가고, 다시 튀어나왔다가 들어가는 일이 반복됐다.

지난 1월 김 여사 명품백 수수에 대해 “국민이 걱정할 부분이 있다”고 말해 윤 대통령 분노를 사자, 서천에서 눈발 맞으며 기다렸다 90도 폴더 인사를 한 것은 그 시작이었다. 검찰의 김 여사 출장조사에 “국민 눈높이에서 아쉬움이 있다”더니 검찰의 무혐의 처분에 “팩트와 법리에 맞는 판단”이라고 했다. 스스로 약속한 채 상병 제3자 추천 특검은 아직도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답변하지 못한다. 김건희 특검법은 지난달 21일 윤 대통령 회동에서 “여론이 악화하면 더 막기 어려운 상황이 올 수 있다”고 하더니, 민주당이 특검 대상을 2개로 확 줄인 수정안에도 결사반대하고 있다. ‘강강약약 보수’(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보수)는 시늉일 뿐, ‘간동훈’이란 소릴 듣는 게 요즘 처지다.

한 대표 상황이 궁하긴 하다. 윤 대통령 반대를 무릅쓰고 나선 7·23 전당대회에서 득표율 63%로 압승했지만 친한계 세력 확보는 더뎠다. 당내 다수파는 여전히 친윤이다. 정국을 주도하는 전략도, 보수정당을 이끌 한동훈식 가치와 비전도 보여주지 못했다. 윤 대통령은 한 대표와의 만남을 꺼렸고, 어쩔 수 없이 만날 때는 다른 사람을 같이 앉혔다. 그새 국민의힘 지지율은 민주당에 역전됐다. 지난주 한국갤럽 조사에서 윤 대통령 국정 지지율은 17%인데, 한 대표의 차기 지도자 선호도는 그보다 낮은 14%였다.

정부와 여당이 공멸 위기의 벼랑 끝에 서자, 윤 대통령과 한배를 타기로 한 모양이다. 일단 보수 지지층을 결집시켜야 내부 분열을 조장하는 배신자 프레임에서 비껴서고, 자신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임박한 1심 선고에서 유죄라도 받으면 국면을 뒤집을 수 있다고 본 건지, 이 대표를 거칠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 대표가 지금을 숨 고르는 시간으로 봤다면 착각이다. 사실상 통치 불능 상태인 윤 대통령의 현실 인식은 그대로다. 사람들은 달라질 거라는 윤 대통령 말을 믿지 않는다. 김 여사 의혹에 명태균 사건이 얹어지면서 윤 대통령 앞날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여권의 위기는 과거와는 차원이 다르다.

윤 대통령이 볼 때 한 대표는 야당의 특검 공세를 막고 자신의 안위를 지켜줄 확실한 도구이다. 미래권력을 꿈꾸는 한 대표는 다르다. 민심을 업고 가야 한다. 지금껏 말하지 못한 두 글자, ‘특검’을 말해야 한다. 그래야 여당에 숨통이 열리고, 한 대표도 산다. 김 여사 의혹이나 채 상병 사건은 진상을 밝히고 책임질 일에 책임을 물어야 끝난다.

한 대표는 대선에 출마하려면 내년 9월 대표직을 내려놔야 한다. 서둘러야 하고, 과감해야 한다. 특검을 외칠 용기도 없다면 정치를 접는 게 낫다.

경향신문

안홍욱 논설위원


안홍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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