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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4 (목)

공중화장실의 작은 창 [크리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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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수욕장 해변을 따라 걷다 “TOI ET” 그리고 “ OIL T”라고 쓰인 공중화장실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임우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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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우진 | 프랑스 국립 건축가



오랜만에 들른 고국. 전례 없이 무더웠던 여름을 보상하려는 듯 가을 햇살은 눈부시다. 금방 가버릴 가을의 끝자락이 아쉬워 동해 바닷가로 향했다. 한 해수욕장 해변을 따라 걷다 “TOI ET” 그리고 “ OIL T”라고 쓰인 공중화장실에 걸음이 멈췄다. “TOILET”이었을 원래 표지판에 이빨 몇개가 빠진 채 방치된 해변의 공중화장실, 관리자의 마음이 멀어져 있음이 느껴진다. 그런데 정작 내 눈길이 멈춘 곳은 그 화장실에 난 작은 창이었다. 남녀로 구분된 두 화장실 건물에는 가로 60, 세로 30㎝ 정도 되는 몇개의 작은 창이 나 있었다. 내부의 채광과 환기를 위해 건축가가 지정한 크기였을 것이다. 화장실이니 환기가 중요하기도 하지만, 혹한·혹서기가 유난히 긴 우리 기후환경에서 환기를 위해 문을 열어놓는 것은 일 년에 몇달 안 된다. 즉 채광 용도로 주로 사용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작은 창은 10㎝가 넘는 넓은 창틀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니 결국 정작 중요한 (채광용) 유리는 창 전체크기의 4분의 1로 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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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창은 10㎝가 넘는 넓은 창틀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니 정작 중요한 채광용 유리는 창 전체 크기의 4분의 1로 줄어 있었다. 임우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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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이런 작은 디테일 뒤에 숨겨진 구조적 맥락이 보이기도 한다. 소규모 공공시설이니 소액의 설계용역비를 받은 바쁜 건축가는 별 고민 없이 창의 크기를 도면에 그려 넣었을 것이다. 최저가 입찰로 공사를 수주한 공사업체 현장소장은 창호업자에게 도면에 그려진 대로 주문했을 것이다. “60×30㎝ 창 6개” 최저가 압력으로 주문받은 창호업자는 자기가 구할 수 있는 가장 싼 창틀로 창을 제작해 납품했을 것이다(싼 창틀은 두껍다. 창호 틀은 얇을수록 기밀성, 단열성, 방호성에 불리하므로 그것을 기술적으로 보완하기 위해 비싸진다). 창을 그린 건축가도, 설계된 크기대로 창을 주문한 건설업자도, 주문받은 크기대로 제작한 창호업자도 각자 자기 일을 문제없이 했지만, 결과는 4분의 1로 줄어버린 창. 더 정확히는 계획보다 반의반으로 줄어버린 채광. 분명 모두가 자기 몫을 충실히 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런 어이없는 결과가 나온 이유는 뭘까?



모두가 사용하지만 정작 주인은 아무도 없는 바닷가 작은 공공시설의 작은 창이 설계보다 더 작아진들 누가 신경이나 쓸까. 하지만 일이 제대로 되려면 이렇게 되어야 했을 것이다. 채광을 위한 최소의 창이 필요하니 창호의 크기뿐 아니라 그 크기에 맞는 창틀 두께와 사양까지 치밀하게 설계하는 건축가, 넓은 틀로 제작하면 제작비를 아낄 수 있지만 얇은 틀로 설계 의도를 충실히 실현하는 건설업자, 설계의 의도대로 시공되는지 공사의 소소한 부분까지 챙기는 감리자와 담당 공무원…. 이런 전문적인 지식과 세심한 마음은 분명 오늘날 우리나라 건축현장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현실과 이상 사이, 이렇게 아득한 간극의 이유는 뭘까. 최저가 입찰 경쟁, 책임소재 불명확성, 콘트롤 타워 부재 등 굳이 찾으려면 이유는 숱하다. 몇해 전 작고한 국내의 한 원로 건축가는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죄와 수치 문화에 속박되어 사는 일본 문화(‘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의 ‘집착과 치밀함’과 상대적인 의미로,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의무감이 사라진 시대, 허술해진 개개인의 양심을 제어하는 치밀한 시스템도 갖춰지지 않은 무중력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무심함’이라고. 그런데 그 ‘무심한’ 작은 창 뒤로,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던 백화점과 다리가, 아이들과 가라앉은 큰 배가, 젊은이들을 삼킨 골목길이 떠올랐던 이유는 또 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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