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27 (금)

‘폐경’ 대신 ‘완경’ 고수한 게임사…보이콧에도 “여성에 대한 예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코리아보드게임즈’가 이달 초 출시한 새 보드게임 ‘메디컬 미스터리: 뉴욕 응급실’ 소개 화면 일부. 등장인물 소개에 쓰인 ‘완경’이라는 표현을 두고 일부 누리꾼이 ‘페미니즘 사상이 담긴 단어’라고 비난하며 불매운동에 나섰다. 코리아보드게임즈 누리집 갈무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뉴스레터 H:730 구독하기. 검색창에 ’h:730’을 쳐보세요.)



‘완경’이라는 단어가 “페미니즘 표현”이라며 일부 누리꾼들로부터 별점 테러와 불매운동 위협을 당한 보드게임 제작사가 “이 표현을 거두지 않는 것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여성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완경’이란 여성이 월경을 더 이상 하지 않는 ‘폐경’을 가리키는 말로, 부정적인 어감을 가진 ‘닫을 폐’(閉)를 긍정적 어감의 ‘완전할 완’(完)으로 대체했다. ‘여성에서 엄마로 이어졌던 인생의 전반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는 의미의 ‘완경’(월경을 완성했다)이기도 하다.



국내 최대 보드게임 제작·유통사인 ‘코리아보드게임즈’는 이달 4일 누리집을 통해 새 보드게임 ‘메디컬 미스터리: 뉴욕 응급실’ 출시를 알렸다. 그런데 게임 속 한 여성인물을 설명하며 “환자는 완경기가 지난 53살 폴리네시아계 여성”이라고 한 부분을 두고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페미니스트(페미)들이 쓰는 용어”라는 비난이 일었다. “코리아보드게임즈 안에 페미가 있는 것이냐”, “알고 보니 기업 대표가 그쪽(페미니즘) 정치 사상을 가진 사람이다” 등의 게시물이 잇달았다. 코리아보드게임즈를 향해 “문제 표현을 수정하고 사과하라”고 하거나 “보이콧(불매)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이에 코리아보드게임즈는 12일 저녁 누리집에 입장문을 내어 “완경이라는 단어를 수정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밝혔다. “의학 용어는 절대불변의 것이 아니다”라며 “당사자를 불편하게 만들거나 부정적 느낌이 들게 하는 말을 고치는 것이 전통적 단어를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또 “완경이라는 표현은 삶의 단계 하나를 완료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당사자들이)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는다고 한다”며 “보드게임을 즐기는 우리들도 모두 각자의 어머니가 있었기에 세상에 태어난 존재다. 이미 사용된 완경 표현을 거두지 않는 것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여성들에 대한 예의”라고 덧붙였다.



이런 행보에 대해 페미니즘 사상검증 공동대응위원회의 레나 활동가는 “게임업계에선 그간 (홍보영상 등에서 남성 비하를 의미하는 집게손이 보인다며) 소비자들이 여성으로 짐작되는 일러스트레이터, 스토리 작가 같은 노동자를 공격하면 기업이 해고나 계약 해지 등 소위 ‘손절’을 했다”며 “무조건 소비자들의 비난을 수용하는 게 아닌 어떤 의미로 해당 표현을 사용했는지 기업이 설명하고 (공격에)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좋은 선례가 나왔다”고 평가했다. 해당 게임을 소개한 게시물 아래에도 “입장문을 보고 응원하는 마음에 구매하러 왔다”, “얼마 전 완경하신 어머니와 함께 게임을 하겠다” 등의 반응이 이어졌다. 아래는 코리아보드게임즈의 입장문 전문.





완경 논란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이번에 ‘완경’이라는 단어를 <메디컬 미스터리: 뉴욕 응급실>에서 발견하고 당황하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경위를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충분한 검토가 부족한 채로 완경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리아보드게임즈는 이 단어를 수정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습니다.



고객의 의견 중에는 이 단어가 엄밀한 의학적 용어가 아니라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학 용어라는 것이 절대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언어는 시대에 따라 바뀝니다. 의학 용어조차도 그렇습니다. 훗날 국립중앙의료원장을 역임하기도 한 어떤 산부인과 의사의 입을 통해서 1990년대에 완경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도, 의학 용어가 어떤 불가침의 것이 아님을 그 의사가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언어가, 용어가 변화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는 당사자를 불쾌하게 만드는 ‘어감’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정신분열증이라는 말이 의학 용어였습니다. 현재는 조현병이라는 말로 대체되었죠. 꼽추라는 말은 척추측만증이라는 말로 대체되었고요. 당사자를 불편하게 만들거나 부정적인 느낌이 들게 하는 말을 고치는 것이, 전통적 단어를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의학의 최대 목적은 사람을 건강하게, 아프지 않게 하는 것일 테니까요. 완경이라는 표현 역시 이와 비슷한 범주의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폐경은 이미 수많은 여성들이 겪은 일이며, 앞으로도 수많은 여성들이 겪게 될 일입니다. 폐경을 겪은 당사자들은 상실감이나 좌절감 등 다양한 부정적인 감정을 겪는다고 합니다. 실제 단어의 뜻과 상관없이 폐경이라는 단어의 어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완경이라는 표현은 삶의 단계 하나를 완료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는다는 느낌이라고 합니다. 단어 하나를 대체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긍정적인 기분을 들게 해준다면 써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드게임을 즐기는 우리들도 모두 각자의 어머니가 있었기에 세상에 태어난 존재입니다. 저희는 이미 사용된 완경이라는 표현을 거두지 않는 것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여성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2024년 11월 12일 코리아보드게임즈





정인선 기자 ren@hani.co.kr



▶▶지금 가장 핫한 뉴스, 빠르게 확인하세요 [한겨레 텔레그램 뉴스봇]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언론, 한겨레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