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14 (목)

트럼피즘의 유령 [김누리 칼럼]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미국 대선 다음날인 지난 6일(현지 시각)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 컨벤션센터에 나타나 지지자들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웨스트팜비치/로이터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김누리 | 중앙대 교수(독문학)



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떠돌고 있다. 트럼피즘의 유령이다. 전세계의 정치인과 관료가 긴장하고, 온 세상의 억만장자와 투기꾼이 흥분하고 있다. 파시스트와 국수주의자도 덩달아 허황된 꿈을 꾼다.



트럼피즘의 유령은 참으로 불가해하고 신비롭다. “불과 4년 전 패배가 확정된 선거를 뒤집으려고 시도한 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가 어떻게 7200만 미국인의 표를 얻을 수 있었는가.”(니나 흐루셰바)



그러나 트럼프의 승리는 결코 우연도 이변도 아니다. 우리가 예전에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징후일 뿐이다. 독일 매체 슈피겔의 사설 ‘서구의 종언’은 트럼프의 귀환을 시대적 변곡점으로 본다.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두번째로 미국 대통령에 선출된 것만큼 이러한 변화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 서구는 지배력을 잃었고, 얼마 전부터 흔들리던 공동의 가치 기반이 무너졌다. 어디서나 긴장이 감돈다. 국가 사이에서나, 사회 안에서나.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에서는 극우가 전진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진영으로서의 서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트럼피즘의 유령은 ‘시대 전환’의 강력한 신호라는 말이다.



첫째, 트럼피즘의 승리는 미국 헤게모니의 종언을 뜻한다. 헤게모니란 ‘동의에 의한 지배’다. 조지 더블유 부시의 이라크 전쟁 이후 급격히 붕괴하던 미국의 세계 패권이 이제 트럼프의 귀환으로 마침내 확실한 종착점에 이르렀다. 트럼프의 신고립주의는 미국이 세계 지배를 위해 동의를 구할 능력도 의지도 없음을 만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오늘날 세계가 처한 위기는 바로 미국 헤게모니의 붕괴와 새로운 헤게모니의 부재 사이에 생겨난 공위기의 위기다.



둘째, 트럼피즘의 승리는 근대 민주주의 체제가 수명을 다했음을 상징한다. 민주적 제도와 법치주의에 기반한 근대 민주주의는 목하 도처에서 위협받고 있다. 유럽 전역을 휩쓸며 기세를 올리던 극우 포퓰리즘이 미국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구가했다. 이미 1940년대에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경고했던 미국의 ‘부드러운 파시즘’이 마침내 ‘거친 파시즘’으로 야수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셋째, 트럼피즘의 승리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시대가 끝났음을 뜻한다. 인종주의, 성차별, 외국인 혐오, 생태 파괴를 거리낌 없이 떠벌리는 트럼프의 정치적 승리는 68혁명 이후 서구의 자유주의 좌파가 힘겹게 쌓아온 정치적 성취와 문화적 자산이 사회적으로 소진되었음을 보여준다.



넷째, 트럼피즘의 승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도 시효가 다했음을 알려준다. 트럼프의 극단적인 보호주의 정책은 국제주의, 유럽연합(EU), 세계시민 등의 기획을 ‘아름다운 옛일’로 기억하게 한다. 국가주의, 민족주의, 애국주의를 바탕으로 한 신고립주의의 확산은 이제 질적으로 새로운 세계가 열렸음을 의미한다. 장기간 헤게모니적 세계 지배를 주도해온 네오콘을 대체하는 ‘미국우선주의’의 마가(MAGA) 세력이 트럼피즘의 핵을 구성할 것이다.



다섯째, 트럼피즘의 승리는 또한 ‘진실 시대’의 종언을 의미한다. 트럼프 1기에 이루어진 가장 치명적인 문화적 변화는 ‘거짓의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탈진실, 탈사실, 대안사실’ 등의 말로 거짓을 호도하는 것이 공식적 정치 문화가 되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바이든-날리면’의 우격다짐을 보라. 이들의 거짓말이 위험한 이유는 거짓을 사실로 믿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을 하나의 ‘의견’으로 강등시키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지금 트럼피즘의 폭풍의 한가운데에 있다. 지구상에서 미국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는 지역이 한반도이다. 그렇기에 트럼피즘의 광풍에 더욱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우선 미국에 대한 유아적 의존성을 벗어던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근대국가의 기본권인 국민주권과 민족자결의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 트럼프의 신고립주의가 열어놓을 새로운 국제질서를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새로운 동북아 질서를 구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특히 트럼프와 김정은의 특수 관계는 향후 한반도 정세에 근본적인 변화를 몰고 올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위기이자 기회다. 미국의 기존 한반도 정책인 ‘전략적 인내’는 한반도에 평화도 안정도 가져오지 못한 채, 북한의 핵무장을 강화하고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이제 트럼프 시대에 우리는 한반도를 ‘세계 최악의 위험지대’에서 ‘영구적인 평화지대’로 전환할 기회를 꼭 부여잡아야 한다.



▶▶지금 가장 핫한 뉴스, 빠르게 확인하세요 [한겨레 텔레그램 뉴스봇]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언론, 한겨레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