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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4 (목)

[신주백의 사연 史淵]과잉 이념과 독립운동 그리고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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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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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민족주의운동 세력과 사회주의운동 세력은 연대 대상으로 보기보단
배제 상대로 취급했다 배제 과정이 격렬할수록 외부 힘에 더 의존했다

여기에 항일·독립 과제가 비집고 들어갈 틈새는 극히 좁을 수밖에 없다
동시에 자기정체성과 주체성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은 강화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념의 과잉과 극단 대결로 치닫는 과정은 민족문제를 풀어갈 공간을 축소해 버렸다
오늘날 분단시대도 똑같다

겉으로는 철 지난 이야기 같지만 사실상 현재진행형이니 윤석열 정부의 독립운동사 이해에 대해 기회가 왔을 때 또다시 언급하려 한다. 워낙 엄중하고 어처구니없는 독립운동사 이해를 거리낌 없이 빈번히 드러내니 말하기도 지치지만, 역사인식의 영역만이 아니라 역사를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서도 말을 아낄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과잉 이념의 제거 대상 김좌진

지난 8월 새로 개정한 한국군의 정신전력교육 기본교재에서 우리가 알 만한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빠졌음이 새삼 확인되었다. 원래 이 기본교재는 작년에 새로 제작되었다가, 독도에 관한 서술에 문제가 있음이 드러나 다시 만든 교재였다. 그런데 이번에 김구, 김좌진, 홍범도 등의 이름이 없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언론 보도를 보고 상상해 보았다. 이승만을 올리려면 김구가 드러나면 안 되었을 것이고, 홍범도는 작년 흉상 철거 시도 때도 말했던 공산당 가입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그런데 김좌진은 왜?

내 능력으로는 도대체 추측할 수 없었다. 1921년 겨울, 다른 독립군처럼 러시아 국경을 넘었다가 스보보드니(자유시)까지 기차를 타고 다시 이동하라는 볼셰비키 측의 요구를 거부하고 만주로 돌아온 그였다. 홍범도와도 확실히 다른 선택이었다. 이후에도 그는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하지 않았다. 더구나 1930년 1월24일 조선인 공산주의자가 저격한 총에 죽은 사람이다.

내 의문은 곧 풀렸다. 여당 대변인이 방송에 출연해 “김좌진 장군이 일부 공산세력과 연계가 있었다는 관련 연구 및 자료를 확인하고 해당 내용을 언급한 것”이라고 용감하게 답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다른 의문이 곧 들었다. 어떤 연구지? 그런 자료가 있나? 그래서 연구자들이 신뢰하는 여러 전문 사이트에서 몇개의 주제어로 검색해 보았다. 그동안 내가 보았던 자료도 뒤져봤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연구 결과와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정신전력교육 기본교재를 집필한 사람들에게 정말 근거가 있기는 한지, 있다면 꼼꼼히 검토해 보았는지도 의문이 들었다. 뭘 보고 그런 말을 함부로 했는지 지금도 의문이지만, 근거가 있다면 독립운동사 연구를 위해서라도 공개했으면 한다.

물론 김좌진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지금도 있다. 누가, 왜 죽였는지 분명한 해명이 안 나왔기 때문이다. 그가 머무르던 목단강 일대, 곧 북만주에서 1930년쯤에 죽임을 당한 독립운동 지도자가 김좌진 말고는 없었기에 궁금증은 더더욱 클 수밖에 없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을 풀어보고자 집중 탐구한 연구들도 있지만, 명백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공산주의자가 그를 죽였다는 정황을 여러 연구가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공통점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황이란 공산주의운동 계열, 그중에서도 화요파라 불리는 그룹과 민족주의운동 계열 사이의 좌우 대결을 가리킨다.

여러 연구는 지도자들 가운데 왜 김좌진이 표적이었을까도 의문을 풀어주고 있다. 신민부 내에서 민정파와 대립하던 김좌진의 군정파가 자신의 영향권에 있는 이주 동포들에게 과도한 의무금을 납부하도록 요구하였다. 납부하지 못하는 동포를 ‘반동분자’로 취급해 압박하거나 심지어 처단하는 경우도 있었다. 1928년 11월 북만주 빈현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의무금 납부를 주저하자 보안대를 출동시켜 수명을 죽인 빈주사건이 대표적인 보기이다. 사건이 일어나자, 민정파조차 김좌진을 ‘동족 학살의 괴수’, ‘혁명의 사기한 장본인’ 등으로 비방·중상할 정도였다. 김좌진이 민중의 머리 위에 앉아 군벌주의 성향을 드러내며 민중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이즈음 공산주의자들도 국제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자본가와 지주, 민족주의자에 대한 공세를 시간이 흐를수록 이전보다 훨씬 강하게 전개하였다. 이 방향이야말로 노동자와 농민이 중심인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는 지름길로도 간주하였다.

이념 과잉으로 왜곡된 남만참변

그런데 만주의 이주 한인사회에서 좌우 대립의 전환점은 김좌진 저격 사건보다 3개월 정도 먼저 일어난 남만참변이었다. 사건은 1929년 10월 민족주의운동단체인 국민부 소속 무장대원들이 흥경현 왕청문의 계곡에서 6명의 청년을 살해하며 일어났다. 남만참변은 서간도, 곧 남만주의 흥경현 왕청문에서 일어난 사건이어서 왕청문 사건이라고도 한다. 김좌진 저격 사건이 공산주의자의 기습 도발이었다면, 남만참변은 민족주의자들의 계획적인 선제공격이었다.

국민부는 자신의 청년단체에 침투해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반대 세력의 결집을 꾀한 주도자들을 더 검거하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또 사건의 파장을 우려해 소속 청년단체들의 결집체인 남만한인청년총동맹 수습대회도 열었다. 수습대회에서는 그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명확히 밝혔고 6명 이외의 몇몇 사람까지 조직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국민부는 수습위원도 선발해 총동맹 관련 단체의 회원들에게 설명하고 그 결과를 수습대회에 참석해 보고하도록 하였다. 말이 설명이지 6명을 학살한 데 따른 동요와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다독이는 행위에 가까웠을 것이다. 김일성도 소년단체의 여론을 수집하고 설명하는 수습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김일성평전-허구와 실상>).

하지만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1권에서 전혀 다르게 기억하였다. ‘왕청문의 교훈’이란 제목이 달린 부분은 동만한인청년총동맹과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을 통합하기 위한 대회를 국민부가 1929년 10월에 소집했다는 서술로 시작된다. 하지만 통합 대회라는 사실 자체가 없었다. 만주지역 조선인 청년운동을 김일성이 지도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왜곡에 불과하다.

회고록에는 국민부가 통합 대회에 참가한 공청원들과 반제청년동맹원들을 검거하려 하자 김일성이 이들을 왕청문에서 서쪽으로 80리 정도 떨어진 영릉가로 피신하게 했다고 나온다. 또 참변이 일어난 소식을 영릉가에서 들은 김일성이 피눈물을 머금고 국민부 지도부의 죄행을 고발하는 성토문을 썼다고도 나온다. 북한 입장에서 남만참변은 민족 단결을 가장 우선으로 내세우며 운명을 개척해 사회정치적 생명을 이어가야 한다는 주체사상을 잘 구현한 역사로 남길 수 있는 사건이었다. 북한은 천세봉의 <은하수>(1982)라는 문학작품으로도 남만참변을 기록해 두었다. 하지만 이러한 서술은 김일성이 남만참변과 청년단체 회합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만큼의 나이와 지위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소년단체 차원이지만 국민부 쪽, 달리 말하면 반ML파에 섰던 행동과 정반대의 회고이다.

실제 남만주 공산주의운동 세력의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는 ML파는 국민부 무장대의 공격을 받자마자 가만있지 않았다. 자신들의 영향권에 있는 농민, 청년 단체들을 동원해 각종 성명서를 발표하고 추모 집회를 열었다. 그들은 국민부를 ‘제국주의의 전초대인 살인강도단’으로 규정하고 간부들을 암살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국민부를 ‘박멸’하자는 구호도 제기하였다. 이에 국민부도 ML파가 일제의 ‘신형 주구’라며 ‘박멸’을 선언하였다. 양측 모두 상대방을 일제의 앞잡이로 낙인찍고 없애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만주지역 조선인 사회에서 매우 긴장된 관계가 형성되었다. 가령 A라는 조선인 마을의 거주자가 C라는 조선인 마을까지 지름길로 가기 위해서는 중간 지대인 B라는 조선인 마을을 지나야만 할 때 그동안 쌓인 갈등으로 목숨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각오가 없으면 통행하기 어려웠다. 두려움의 대상이 마적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듯 남만참변은 이후 만주지역 독립운동에서 자신과 경쟁 관계에 있는 세력을 약화하고 제거하는 방법의 하나로 상대방을 친일 주구로 몰아붙여 ‘적’으로 취급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직접적인 계기였다. 만주의 민족주의운동 세력과 사회주의운동 세력은 서로를 함께 걸어가야 할 연대의 대상으로 바라보기보다 배제해야 할 상대로 취급하기 시작하였다. 국내외 민족 역량을 결집하려는 협동전선체인 신간회를 박멸하자는 구호가 1930년 5월 만주에서 처음 등장한 현상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적대적 배제 과정이 격렬할수록 상대보다 우월하거나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각자 외부의 힘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당시 민족문제의 핵심인 항일과 독립의 과제가 비집고 들어갈 틈새는 극히 좁을 수밖에 없다. 동시에 자기정체성과 주체성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은 강화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념의 과잉과 극단적 대결로 치닫는 과정은 민족문제를 풀어갈 공간을 축소해 버리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하겠다. 이건 오늘날 분단시대에도 마찬가지다.

경향신문

신주백 역사학자


신주백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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