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죄·무죄 판결은 재판부의 몫
단, 거짓말은 ‘표현의 자유’ 아냐
이 권리 남용하려는 자 막아야
국민 다수가 ‘표현의 자유’ 누려
지난 10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공직건거법 위반 사건 관련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청사 건물로 향하고 있다. /장련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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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학자들이 말하는 ‘강대국의 조건’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핵, 첨단 군사력, 경제·외교·문화적 사이즈를 갖췄다고 저절로 강국인 것은 아닙니다. 강국이란, 국민이 국가의 공정함에 무한한 신뢰를 가질 때 비로소 그렇게 부를 수 있습니다. 어떤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든 그들이 “국가는 룰에 의해 판단할 뿐 결코 특정 개인을 위해 모두의 룰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어야 진짜 강국입니다. 정부의 공정함이 위협받을 땐 국가 사법이 마지막 보루입니다.
젊은이가 국가 사법이 공정하다고 믿을 때, 다시 말해 편의점 알바생이나 대기업 총수나 유력 정치인이나 똑같은 잣대로 법의 심판을 받는다고 믿고 체감할 때 그들은 국가를 존중하고 국가를 위해 희생할 결심을 합니다. 이러한 결심의 총합보다 국가를 강하게 만드는 힘은 없습니다.
오는 15일은 우리에게 중요한 날이 될 것입니다. 그날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의 피고인 이재명에게 1심 선고가 내려지는데, 그가 유죄냐 무죄냐를 떠나 훨씬 중요한 게 있습니다.
2016년 실화 영화 ‘나는 부정한다’는 홀로코스트를 조작된 거짓이라고 했던 사이비 역사학자와의 법정 싸움을 그렸습니다.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다니 너무나 쉽게 단죄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사건이었습니다만 의외의 난관에 봉착합니다.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역사적 기록이나 어떤 주장도 법정에서 법리와 증거에 따라 그 진위를 입증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15일 판결도 비슷합니다. 피고인이 허위 사실을 알고 말했든 모르고 말했든 증거로 판결한다는 게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유죄를 선고할 경우 야권은 “선거 토론에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주장을 펴며 법원 판단을 비난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판결에서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강변입니다. 제가 오늘 재판부에 편지를 드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번 판결은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표현의 자유를 지켜야 하는 문제와 직결돼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남용하려는 자들을 막아야만 절대 다수에게 진정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됩니다.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할 순 있지만 거짓을 말하고도 책임을 피할 순 없습니다. 거짓은 표현의 자유가 아닙니다.
다만 피고인이 의도적으로 거짓을 말했는지 여부는 오로지 재판부가 판단할 몫으로 존중 받아야 합니다. 선고가 있기 며칠 전에 언론이 특정 방향으로 예단하려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재판부는 이번 판결을 통해 고 김문기 처장의 유족들에게도 답해야 합니다. 재판부는 김 처장의 이름이 확실히 기억됐으며, 유족의 울분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모욕감이 씻어졌는지에 대해서도 말해줘야 합니다. 피고인이 “기억에 없다” “체통 떨어진다”고 한 말에 일리가 있는지, 아니면 국가가 유족에게 명예 회복의 기회를 줘야 하는지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피고인이 백현동 용도 변경 때 국토부의 ‘협박’을 느꼈는가 아닌가 하는 주관적 인지(認知) 여부만을 판단할 게 아닙니다. ‘협박이 없었다’고 증언한 여러 국토부 공무원과 성남시 공무원의 양심이 정당했는지, 국가가 지켜줄 수 있는지를 판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피고인의 유죄 여부보다 몇십 배 더 중요한 사안입니다.
그날은 국가의 공정함이 얼마나 삼엄한지를 국가 권능의 최후 보루인 사법부가 국민 앞에 입증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일부 고위 선출직과 수하들이 각종 인허가 결재권을 주무르면서 다른 선량한 공직자를 찍어 누르는 결과였는지 아니면 나름 큰 업적이었는지 양단 간에 확인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이재명을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그의 사법 리스크와 사법 방해 논란을 둘러싼 우리 정치권의 휘둘림 현상에도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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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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