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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째 공연 중인 1인극 '벽속의 요정'을 연출한 손진책 연출가(왼쪽)와 작품에 출연하는 김성녀 배우. 김호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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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은 이 부부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배우자이기 전에 예술가의 길을 함께 걷는 동지로서 서로를 신뢰해온 두 사람. 1977년 결혼해 48년째 해로 중인 손진책 연출가(77)·김성녀 배우(74)의 이야기다.
손진책이 연출하고 김성녀가 열연하는 1인극 '벽속의 요정'이 공연 중이다. 2005년 초연 이후 20년째다. 손진책이 결혼 30주년을 앞둔 선물로 김성녀에게 만들어준 이 작품을 두 사람은 코로나19 시기를 제외하고 매년 무대에 올리고 있다. 정원에 심은 묘목처럼 20년째 작품을 함께 정성껏 가꾸고 있는 셈이다.
손진책은 "20년이라는 시간이 참 금방 갔다"며 "본인(김성녀)과 관객이 모두 좋아하는 연극을 계속할 수 있어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벽속의 요정'은 1950년대에 반정부 인사로 몰려 집안 벽 속에 숨어 지내는 아버지와, 그를 '벽속의 요정'이라고 믿으며 성장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한 명의 배우가 2시간 동안 32명의 인물을 연기하며 소리(唱)와 춤, 연기를 선보이는 뮤지컬 모노드라마다. 국극 배우인 어머니 박옥진과 아버지 김향 연출가의 영향으로 다섯 살부터 무대에 섰고 판소리와 창극, 현대극을 두루 섭렵한 만능 예인 김성녀(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여서 가능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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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속의 요정'에서 열연하는 김성녀. 극단 미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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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속의 요정'은 김성녀의 배우 인생에서 특별한 작품이다. 윤석화, 박정자 등 유력한 여배우들이 일찌감치 1인극으로 이름을 날린 상황에서 자신의 대표작으로 내세울 1인극을 하고 싶었으나 부부가 속한 극단 미추의 사정 등으로 오랜 기간 성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송승환 배우의 PMC프로덕션이 '벽속의 요정'을 기획하면서 김성녀를 배우로 초청하고, 김성녀가 연출가로 손진책을 지목하면서 55세에 비로소 1인극에 출연하게 됐다.
김성녀는 "1인극은 배우의 무덤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배우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갈채도 손가락질도 오롯이 혼자 받아내야 한다"며 "50대 중반이 돼서야 1인극을 했지만 20년 동안 현역 배우로 1인극을 하는 사람은 저뿐이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손진책에게도 '벽속의 요정'은 특별하다. 연출을 계속해서 수정했던 다른 작품과 달리 '벽속의 요정'은 초연부터 20년간 연출을 바꾸지 않았다. 손진책은 "이 작품은 초연 때도 연습 기간이 열흘 내외로 짧았는데 시간이 가도 연출을 바꿀 필요성을 못 느꼈다"며 "주제가 보편적이고, 채우는 연극이 아니라 비우는 연극이어서, 생명체처럼 매회 살아 움직이는 공연에서 배우(김성녀)가 진실성 있는 연기를 보여서인 거 같다"고 설명했다.
아내가 재능을 꽃피울 무대를 만들어주는 남편과 남편의 뮤즈인 아내는 서로에게 어떤 존재일까. 두 사람은 동지라고 밝혔다. 김성녀는 "남편은 도를 닦듯 성스럽게 연극을 하는 사람"이라며 "저의 장점을 잘 뽑아낼 수 있어 신뢰하는 연출가, 제가 아내보다 배우로서 더 잘하기를 바라서 존경하는 예술가"라고 설명했다. 손진책 또한 "아내는 내가 믿는 배우"라며 "곤충이 더듬이가 있듯 타고난 연극적 감각을 가졌고, (예술가였던) 부모님의 영향, 어릴 때부터 (예술을) 공부한 지식이 있어 (아내의) 판단을 신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벽속의 요정'은 연극 배우로서 김성녀의 위상을 높여준 대표작이지만 그를 괴롭힌 작품이기도 하다. 2시간 동안 홀로 32인 역을 연기하는 것은 초인적 공력이 들기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김성녀는 50대 시절의 넘치는 힘을 점차 빼면서 노련한 연기로 다섯 살 아이부터 20대 여인, 70대 노인 등을 표현해왔다.
김성녀는 "제게 이 작품은 월계관(영광)이자 가시관(고통)"이라며 "이번 공연에서도 나이에 맞게 부담 없는 에너지로 안정감 있는 연기를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20년 함께 가꾼 이 작품을 언젠가 다른 배우와 연출가가 관객에게 선보이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성녀는 "노래와 연기를 모두 잘하는 다른 배우가 이 연극을 새롭게 만들어줄 것을 기다린다"며 "(출연을 원하는) 모든 배우가 후보자"라고 강조했다. 손진책은 "우리는 언젠가 물러난다"며 "이 작품을 하고 싶어하는 배우들이 많으니 대를 이어 공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벽속의 요정'은 10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된다.
[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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