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업계 ‘고무줄식 회계’에 제동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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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초 새 보험회계기준(IFRS17)이 도입된 뒤부터 보험사들이 무해지·저해지 보험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가정해 실적을 부풀리는 ‘고무줄 회계’ 논란이 끊이지 않자 결국 금융 당국이 칼을 빼들었다. 그동안 보험사들은 무·저해지 보험의 해지율(중도 해지하는 비율)을 의도적으로 높게 추정하는 방식으로 순익을 늘리고 회계 착시를 일으킨다는 지적을 받았다. 금융 당국은 올해 연말 결산부터 고환급형 무·저해지 보험의 해지율 가정을 보수적으로 잡기로 했다.
◇금융 당국, 제4차 보험개혁회의 열어
4일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김소영 금융위 부위원장 주재로 ‘제4차 보험개혁회의’를 열고 IFRS17 안착을 위한 제도 개선 방안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개선안에 따르면, 앞으로 보험사는 무·저해지 보험을 판매할 때 표준형 상품보다 더 많은 해지 위험액을 쌓아야 한다.
이날 제도 개선 방안의 초점은 최근 보험사들이 판매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는 무·저해지 보험이다. 무·저해지 보험은 계약을 해지할 때 지급하는 해지 환급금이 아예 없거나 일반(표준형) 보험보다 적은 상품이다. 어린이보험이나 성인종합보험 등에 가입할 때 무해지나 표준형 중에서 선택해 가입할 수 있는데, 해지 환급금을 적게 돌려받는 만큼 보험료는 표준형보다 절반 가까이 싸다.
김소영 부위원장은 “계리적 가정 등이 전제되는 IFRS17이 고무줄식 회계가 아니라 보험사의 실질 가치를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게 하겠다”면서 “개별 보험사의 비합리적·자의적 회계는 반드시 뿌리 뽑겠다”고 했다. 당국은 이날 논의한 보험건전성 감독 강화 방안이 시장에 신속히 적용될 수 있도록 관련 세칙 개정 등을 속도감 있게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래픽=김성규 |
◇무·저해지 보험, 판매 비중 상반기 63%
보험개발원 등에 따르면, 생·손보 업계의 개인 보장성 보험 중 무·저해지 보험 판매 규모는 2018년 1584억원에서 2023년 9690억원으로 6배 뛰었다. 전체 개인 보장성 상품 대비 판매 비중도 2018년 11.4%에서 지난해 47%로 올랐다. 올해 상반기엔 63.8%를 기록했다.
새 회계 제도인 IFRS17가 지난해 초 도입되면서 관련 문제가 불거졌다. 이 제도에선 보험사의 재무 성과가 계리(보험사의 회계)적 가정에 따라 매우 민감하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회계 제도는 보험사들이 미래에 고객으로부터 얼마를 받고(보험료) 얼마를 주는지(보험금)를 원가가 아니라 현재 가치로 계산해 재무제표에 반영한다. 보험사가 미래를 낙관적으로 가정할수록 현재 이익이 늘어나는 구조다.
그런데, 무·저해지 보험과 관련해 대표적으로 보험사들이 가정하는 지표 중 하나가 ‘해지율’이다. 보험 가입자가 중간에 보험을 해지하는 비율이다. 무해지 보험은 보험사가 해지율을 높게 잡으면, 당장의 실적이 좋게 표시된다. 앞으로 고객들이 해지를 많이 할 것이라 가정해서 미래에 나갈 보험금이 매우 적으리라고 예상하는 것이다.
문제는 해지율이 예상보다 낮을 때다. 해외에서는 해지율을 낙관적으로 가정했다가 결국 파산에 이른 보험사가 여러 곳 있다. 한국보다 앞서 무해지 보험을 판매한 미국·캐나다에서는 무리하게 해지율을 높게 잡아 1990년대 이후 보험사 5곳이 연쇄 파산하기도 했다.
◇결국 제동 걸고 나선 당국
이번 개선안은 이런 자의적인 가정에 제동을 걸겠다는 것이 골자다. 당국은 보험사들이 무·저해지 상품의 이런 해지율에 대한 가정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설정하고 있다고 본다. 보험사들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 줄줄이 역대급 실적을 갈아치우고 있는 것도 이런 보험사들의 자의적 가정과 무관치 않다는 지적도 많다.
일각에서는 이런 당국 안을 적용한다면 보험사의 수익성, 건전성 지표가 모두 크게 나빠질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특히, 자본력이 부족한 중소형사는 더욱 문제다. 다만, 한 보험사 관계자는 “새 회계 제도 시행이 2년을 넘지 않은 올해가 문제 해결의 마지막 골든타임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무·저해지보험
무해지보험은 계약을 중도 해지할 때 환급금을 아예 주지 않거나 일반 보험에 비해 아주 적게 주는 상품이다. 일반 보험의 경우 중도 해지하면 그동안 납입한 보험료의 일부를 환급해 주는데, 이 상품은 해지 환급금이 거의 없는 대신 보험료가 절반 가까이 저렴하다.
[한예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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