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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 (금)

“치료하러 갔다가 거꾸로 내 인생을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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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박돈규 기자의 2사 만루]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 33년

JW성천상 받은 유덕종 교수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은 1992년 ‘정부 파견 의사(정파의)’ 1기 세 명을 선발해 아프리카로 보냈다. 안동병원에서 근무하던 유덕종씨는 우간다로 갔다. 이 청년 의사는 2년마다 정파의 계약을 연장하면서 계속 그곳에 남았다. 이제 예순다섯 살. 그는 에스와티니(옛 스와질란드)를 거쳐 지금은 에티오피아에서 의료 봉사를 하고 있다. 줄잡아 33년, 반평생을 아프리카에서 보낸 셈이다.

“제 인생의 황금기는 우간다에서 보낸 23년이었어요. 1970년대의 한국이 떠오르는 나라죠. 전기와 수도, 의료와 치안 등 부족한 게 많은 우간다에 비하면 한국은 풍족해요. 파라다이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감사할 줄 모르고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 불행하게 살아가는 분이 많은 것 같아요.”

제12회 JW성천상을 받은 유덕종(65) 에티오피아 세인트폴병원 밀레니엄 의과대학 교수는 “아프리카에서 ‘낮아짐의 행복’을 배웠다”고 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치료하다 결핵에 걸렸고, 에이즈 환자를 찌른 바늘에도 찔려 봤다. 큰딸은 뇌수막염으로 사경을 헤맨 아프리카에서 행복을 배웠다고?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행복의 비밀을 이제는 알 것 같다”고 말하는 이 의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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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덕종 교수와 의대생들이 우간다 물라고 병원에서 회진하는 모습. 아프리카 제자가 4000명에 이른다. /유덕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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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다” vs. “미친놈”

가을비가 내려 축축한 날이었다. 시상식에 참석하러 한국에 온 유덕종 교수는 외모부터 범상치 않았다. 반백의 긴 머리를 질끈 묶었고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지금도 코이카 소속인지 묻자 “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정파의를 지냈고, 코이카 중장기 자문단을 거쳐 글로벌 협력의사로 근무 중”이라고 했다.

–외모도 그렇고 명실공히 ‘아프리카 사람’이네요.

“면도하기도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제가 또 게을러서 콧수염은 1~2주에 한 번 가위질하는 식으로 길렀어요. 이발해 주던 집사람이 코로나 사태 때 귀국하는 바람에 머리도 묶게 됐고요. 1년 뒤에 돌아온 집사람은 귀찮았는지 ‘그냥 기르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가끔 보는 한국이 낯설 것 같습니다.

“정파의 때는 4년마다 귀국했는데 글로벌 협력의사는 해마다 올 수 있어요. 아이들(1남 2녀)은 모두 아프리카에서 초·중·고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된 둘째딸로부터 한국 현실을 듣는데 참 안타까워요.”

–무엇이 안타깝나요?

“한국 사람들은 아파트 평수라든지, 서울이면 강남인지 아닌지, 자가인지 전세인지 등으로 갈라집니다. 아이들마저 그렇다네요. 40~50년 전에 비하면 훨씬 잘사는데 남과 비교하면서 쓸데없는 빈곤감에 시달리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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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덕종 교수는 “가난하고 병이 들어도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체험했다”며 “높은 지위에 서려 하기보다 낮은 데로 내려가는 삶,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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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시절로 돌아가 보죠. 왜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까.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가, 중학교 1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다 염세주의에 빠졌습니다. 고향은 대구이고 아버지는 보건소 공무원이었어요. 의사를 최고의 직업으로 보셨는지 ‘경북대 의대를 가라’고 하셨습니다.”

–본인이 지망한 게 아니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인생은 허무한데 이왕 의사가 된다면 봉사하며 사는 게 의미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 막연하지만 슈바이처처럼 아프리카에서 봉사하는 삶을 꿈꾸기 시작했지요.”

–의대 졸업 후 내과 레지던트로 수련하는 동안 그 꿈에 동행할 여성을 만나 결혼했다고 들었는데, 너무 용의주도한 거 아닙니까?

“하하하, 아프리카를 향한 꿈이 분명해졌으니 같이 갈 사람이 필요했던 거죠. (결혼과 아프리카가 2종 세트였는지 묻자) 따지자면 그런데요, 같은 교회에 다니는 자매 가운데 아프리카까지 갈 사람을 물색했어요.”

–정파의로 지원할 땐 어떤 마음이었나요.

“군의관 복무까지 다 마쳤으니 ‘아프리카에서 살다 아프리카에서 죽어도 좋겠다’였습니다. 주변에서 ‘대단하다’는 칭찬과 함께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 많은데 자식들은 또 어떡할 거냐’며 미친놈 소리를 들었지요.”

–만류하는 분들에게 뭐라고 답했습니까.

“한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의사는 나 말고도 많을 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 갈 의사는 드물 테니 내가 가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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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정부 파견 의사(정파의)’ 1기로 우간다로 파견된 유덕종씨는 2년마다 정파의 계약을 연장하면서 계속 그곳에 남았다. 우간다, 에스와티니(옛 스와질란드)를 거쳐 지금은 에티오피아에서 의료 봉사를 하고 있다. 그가 악전고투를 담담하게 기록해 2016년 펴낸 책 '우간다에서 23년'이 보인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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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지켜보다

열대병 교육부터 받았다. 정파의 보수는 안동병원의 3분의 1. 아내와 두 딸을 남겨두고 1992년 6월에 먼저 출국했다. 영국 런던에서 우간다로 향하는 낡은 비행기에 오르자 승객 대부분이 흑인이었다. 다른 세계로 간다는 게 실감났다.

–이디 아민이 쿠데타로 집권한 뒤 악행을 저지른 나라인데 두렵지 않았나요.

“우간다 공항에 도착하니 군인들이 모두 총을 들고 있었어요. 살벌했죠. 대사관에서 구해준 집은 감옥 같았습니다. 도둑과 강도가 많아 문과 창문에 쇠창살이 박혀 있었지요. 밤에는 총소리가 들렸고요. 1993년 2월에 생후 5개월 된 아들까지 가족 모두가 우간다로 건너왔습니다.”

–잘못 온 거 아닌가 후회하진 않았습니까.

“치안과 의료가 엉망이었어요. 에이즈·말라리아 등 제가 배우거나 치료한 경험이 없는 질병이 대부분이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변변한 약품도 없었고요. 다른 나라라면 충분히 살 수 있는 환자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속수무책 지켜봐야 했습니다. 총알도 없이 최전방에 던져진 채 몰려오는 적군들을 바라보는 군인의 심정이랄까요. 무력감과 회의가 한동안 지속됐지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루에 수십 번씩 했습니다.”

–상황을 좀 더 설명해주신다면.

“물라고 병원은 병상 가동률이 늘 100%가 넘어 복도까지 환자들이 누워 있었어요. 내과는 입원 환자 대부분(70~80%)이 에이즈 환자였고, 평소엔 병원 구경도 못하다 죽을 자리를 찾아온 것 같았습니다. 코이카를 통해 항생제나 인슐린을 조금 받아도 투여할 환자를 선택해야 해 괴로웠어요.”

–고통의 나날들을 어떻게 견뎠습니까.

“돌아가고 싶다는 유혹과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 사이에서 갈등했지요. 불편은 어차피 각오한 것이었고 2년쯤 지나니 내면적 어려움도 감당할 수 있게 됐습니다. 작은 보람도 생겨났지요. 의과대학에서 똑똑하고 눈이 반짝거리는 제자들을 가르쳤고, 제가 가진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들이 회복되는 기쁨을 맛봤습니다. 가난이 행복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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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간다 물라고 병원에서 기관지경 검사를 마친 환자와 함께 /유덕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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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행복일 수 있다고요?

“저는 흙수저 출신이지만 가난은 불편한 것일 뿐 불행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를 겸손하게 만들고 주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죠. 그래서 가난이 행복일 수 있는 겁니다. 선의로 아프리카에 와도 오래 못 버티는 분이 많은데 대부분 부유하게 살면서 착한 마음을 가진 경우예요. 저는 제가 흙수저라는 데 감사해요.”

–한국에서 당연한 게 아프리카에선 큰 기쁨이 될 수도 있나요.

“그럼요. 스위치를 올리면 전등이 켜지고 꼭지를 틀면 수돗물이 나올 때 얼굴에 웃음꽃이 핍니다(웃음). 풍요가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앗아가는 것 같아요.”

–치료하다 고난을 겪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에이즈 환자의 피부를 봉합하다 바늘에 손이 찔렸고, 마스크 없이 내시경을 하다 결핵에 전염돼 70kg이던 체중이 51kg까지 빠졌어요. 그런데 환자들 처지를 경험해 보니 그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에이즈 환자들은 ‘낙인 찍기’를 두려워하는데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저도 그렇더라고요. 결핵은 여전히 통증이 남아 있습니다. 결핵 환자에게 ‘나도 이겨냈다’고 하면 위안이 되는지 얼굴에 미소가 생겨요.”

–기억에 남는 한 순간이라면.

“큰딸이 뇌수막염으로 생사를 오갈 때 전기도 없이 모기장 안에 촛불을 켜고 돌보던 장면입니다. 응급 상황이 생길 경우 한국이라면 인공호흡이나 보조 치료로 대처할 수 있어요. 아프리카에는 그게 없었지요. 생명만 유지하면 나아질 가능성이 높은데, 손쓸 방도가 없으니 괴로웠습니다.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라 많이 울었지요. 그 시간을 통해 귀중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어떤 교훈인가요?

“물에 빠져야 공기의 소중함을 알듯이, 아이들이 하는 가장 큰 효도는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이구나. 살아 있기만 해도 감사한 일이구나. (저라면 가족을 데리고 당장 귀국했을 것이라고 하자) 동료이던 독일 의사는 이렇게 위로했어요. 인생에 이렇게 나쁜 일은 다시 안 생긴다고. 포탄이 한 번 떨어진 자리는 안전하다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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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덕종 교수가 2002년 우간다 수도 캄팔라에 세운 베데스다 클리닉. 고아원은 물론 난민촌이나 오지를 찾아가 무료 진료를 한다. /유덕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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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의사 4000명의 스승

큰딸이 죽을 고비를 넘기자 그는 환자를 제대로 치료할 수 있는 병원 설립을 꿈꾸기 시작했다. 길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뜻을 세우자 한국에서 기부금이 모여들었다. 2002년 우간다 수도 캄팔라에 베데스다 클리닉을 개원했다. 2005년 물라고 병원에 호흡기내과를 창설했고, 2015년엔 에스와티니에 의대를 만들었다.

–’내일은 나아지겠지’라는 희망만 품지 않고 하나씩 실현하신 것 같아요.

“몽상가(dreamer) 소리를 들었지만 할 수 있는 건 하려고 노력했어요. 많은 도움을 받아 베데스다 클리닉이 문을 열었고 지금도 운영되고 있으니 감사한 일이죠. 한국 의사가 4명, 한국 약사가 1명 있습니다. 난민촌과 오지를 방문해 무료 진료를 해요. 조선대 의료팀이 해마다 의료 선교를 하러 오고요.”

–넉넉하고 여유가 있어야 봉사도 하는 줄 알았습니다.

“넉넉하면 봉사하기가 쉽지 않아요. 더 가지고 싶고 지키기 바쁘죠. 부족한 사람 눈에 부족한 게 더 잘 보입니다. 봉사는 거창한 게 아니라 내가 좀 더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는 마음입니다.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그냥 주는 거예요.”

–아프리카에서 다른 장애물은 없었나요.

“처음에는 언어와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힘들었습니다. 영어 실력은 차츰 나아졌고 한국 국력이 커지면서 차별도 사라졌어요. 날씨는 에티오피아보다 한국이 더 덥네요(웃음).”

–가장 그리운 음식이라면.

“수련의 시절 병원 근처에서 먹던 짜장면이 어른거렸지요. 어제 인천공항 도착해서 짜장면 먹자니까 집사람이 ‘중식은 싫다’고 해서 별수 없었지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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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한 의대에서 강의하고 있는 유덕종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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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은 아프리카에서 보낸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나요.

“부정부패가 심하고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이 많지만, 불편하거나 열악한 조건에서 어려움을 극복해 본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아요. 가지지 않은 것에서 자유롭고요. 큰딸은 박사과정을 마치면 아프리카로 돌아가 일하고 싶어합니다.”

–그곳에서 길러낸 의사도 많지요?

“어림잡아 4000명이요. 우간다와 에티오피아에 절반씩 있습니다. 그 숫자만으로도 든든해요. 제자 중에 우간다 보건부 장차관도 나왔습니다.”

–제자들에겐 평소 무엇을 강조했습니까.

“이 환자는 내가 돌봐야 한다, 내가 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책임감입니다. 내과는 특히 그래요. 가족같이 생각해라, 네 부모라면 이렇게 치료할 것이냐? (‘호통 의사’ 같다고 하자 웃으며)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들 저한테 고마워합니다.”

–지난 33년 동안 가장 큰 보람이라면.

“글쎄요. (잠시 생각하다)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 곁에 머물 수 있었다는 것, 함께 아파하며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에요. 제가 그들을 치료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들을 통해 제가 치유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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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JW성천상을 받은 유덕종 교수와 가족. 독일 유학 중인 큰딸은 참석하지 못했다. 이성낙 JW성천상위원회 위원장은 "유 교수는 아프리카의 열악한 의료 환경에서도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며 "다양한 지역에서 의료 시스템 개선과 의료인 양성을 이어가며 생명 존중 정신을 계승하는 JW성천상 제정 취지에 적합해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했다. /JW홀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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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광풍… 성공이란 무엇인가

한국에서는 ‘의대 광풍’, 즉 우등생들의 의대 쏠림이 심하다. 내년도 의대 신입생이 증원되자 자퇴하고 수능을 다시 보는 공대생 이탈자도 급증했다. 유덕종 교수는 “국가 전체로 보면 손해”라고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의사는 정해진 프로토콜을 따를 수 있는 두뇌와 책임감만 있으면 됩니다. 정말 똑똑한 학생은 공대 쪽으로 가서 창의력을 발휘해 나라를 먹여 살려야죠. 인류에 봉사할 수 있는 인재들이 의대로 몰린다는 건 바람직하지 않고 소모적인 현상입니다.”

–실력 외에 의사가 가져야 할 덕목이라면.

“환자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제자들에게 ‘책임감이 있으면 네가 몰라도 논문을 읽고 치료법을 찾게 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실력은 있지만 책임감이 없다면 환자를 팽개치게 됩니다.”

–어떤 집에 살고 연봉은 얼마이며 무슨 자동차를 타는지로 사람을 평가하고 비교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 정말 안타까워요. 그게 ‘졸부’ 아닌가 싶습니다. 물질적으로는 갑자기 부자가 됐지만 정신이나 가치관은 미성숙한 상태인 거예요.”

–성공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것, 그게 성공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괜찮은 삶을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낮아짐의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제 삶의 처방전은 낮아짐이었습니다. 정상에 오른다고 계속 행복할까요? 사람들은 좀 더 큰 집, 높은 지위를 움켜쥐려 하는데 그러다 보니 과도한 경쟁과 질시, 모함이 생깁니다. 낮아지고자 하는 사람에겐 그게 없어요. 내가 좀 손해 보면 남에게 유익하니까 윈윈이죠.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좋은 게 낮아짐의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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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세인트폴병원 밀레니엄 의대 유덕종 교수. "저한테는 우간다가 ‘영혼의 고향’이고 영주권도 있어요. 은퇴하면 우간다로 돌아갈 겁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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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장과 사는 분이야말로 특별할 것 같습니다.

“집사람이 저보다 훨씬 훌륭해요.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반대도 많이 했어요. 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너무 힘든 선택을 하지 않도록. 원래 가정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였는데, 결혼하고 경북대 간호학과에 입학해 자격증까지 땄습니다. 결국 장롱 면허가 됐지만(웃음).”

–교수님을 간호한 것 아닐까요?

“하하하, 맞습니다. 제 몸과 마음이 아플 때 간호해 줬어요. (이 기회에 속마음을 전하라고 하자) 쑥스럽게, 제가 원래 경상도 사람이라서요. 아프리카에서 반평생을 살아도 지워지질 않네요.”

–JW성천상 상금 1억원은 어디에 쓰나요.

“2015년에 아산상을 받았을 때 상금은 우간다 의료계에 썼거든요. 이번 1억원은 세 덩어리로 나눠 하나는 우간다, 하나는 에티오피아, 하나는 가족을 위해 쓰고 싶습니다.”

–앞으로 계획이라면.

“저한테는 우간다가 ‘영혼의 고향’이고 영주권도 있어요. 은퇴하면 우간다로 돌아갈 겁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과 함께하는 게 제가 배운 행복의 비밀이에요. 글로벌 협력의사는 2026년 3월까지인데, 제가 집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지, 아니면 설득당할지는 잘 모르겠어요(웃음).”

보태고 싶은 말을 청했다. 유덕종 교수는 “우리 의사들이 좀 더 시야를 넓혀 아프리카나 후진국으로 가서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보건복지부 관료가 방송에 나와서 말하는 걸 우연히 봤는데 염려가 됐습니다. 의사들 자극하며 자존심 긁어놓고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저러는지. 쉽지 않겠지만 정부도 양보하고 의사들도 양보해야죠. 의정 갈등으로 애꿎은 환자들만 고통받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파요.”

[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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