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01 (금)

독립영화 ‘장손’으로 관객 3만… 대구 장손이 일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영화 ‘장손’ 오정민 감독

대구 두부공장집 장손(長孫)이 영화 ‘장손’으로 한국 독립영화 흥행에 큰일을 해냈다. 9월 11일 개봉한 ‘장손’은 개봉 50일째인 지난 30일 관객 3만명을 돌파했다. 상영관 30여 곳, 일평균 스크린 점유율 0.5%로 이뤄낸 놀라운 성적이다. 올해 개봉한 한국 독립영화 중 대형 배급사를 끼지 않고 3만 이상 관객을 모은 작품은 ‘한국이 싫어서’와 ‘장손’ 둘뿐이다(다큐 제외). ‘한국이 싫어서’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라는 흥행 촉매제가 있었으나 ‘장손’은 작품성이라는 맨손으로 이뤄낸 기록이다.

조선일보

영화 '장손'으로 장편 데뷔한 오정민 감독은 "위 세대에 대한 정중한 경의를 담아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오 감독은 이달 열리는 올해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 후보에도 올랐다. /인디스토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장손’은 성균관대 국문과·한국영화아카데미 연출과를 졸업한 오정민(35) 감독의 야심만만한 데뷔작이다. 경상도 두부공장집 3대 가족이 제삿날 한자리에 모였다가 “두부 안 만들고, 배우 하겠다”는 장손의 폭탄선언을 계기로 겹겹의 비밀이 드러난다. 가족의 참된 의미와 대한민국 근현대사까지 아우르는 너른 품에 오 감독은 30일 발표된 올해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 후보로도 올랐다. 오 감독은 본지 인터뷰에서 “저를 아껴주시던 할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신 후 충격을 이겨보려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며 “경의를 다해 위 세대를 떠나보내는 심정을 담았다”고 말했다.

영화는 실제 장손으로 자란 오 감독의 경험이 뼈대가 됐다. 대구 대명동 두부공장집 외아들인 오 감독은 할아버지의 육촌까지 모이면 도합 100명이 넘는 대가족의 장손으로 자랐다. “저희가 일가 대소사를 꼼꼼히 챙기는 집안이라서요, 제사 한번 닥치면 적어도 50명, 옆집까지 빌려서 두 채에 나눠 1박 2일 숙박하며 치러냈어요.”

조선일보

영화 '장손'의 한 장면. 제삿날 내려온 장손(왼쪽)이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있다. 배우가 꿈인 장손이 가업인 두부공장을 잇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평지풍파가 인다. /인디스토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여느 중소기업 단합회만큼이나 북적이던 대가족 관혼상제 의례의 한가운데, 애정과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오 감독은 언제부턴가 복잡한 감정을 갖게 됐다. 자신에게 쏠린 사랑이 반대편에서 외면받는 다른 식구에겐 폭력이 될 수 있다는 미묘한 마음이었다. 영화에선 큰고모가 예상치 못한 선택을 하는 장면으로 보여준다.

오 감독의 ‘장손’은 단순한 가부장제 비판이 아니다. 혈연으로 칭칭 감긴 굴레에 눌어붙은 찐득한 애증이 세대간 화해의 소실점에 정확히 맺힌다. 대가족의 일상을 살짝 비트는 장면에서도 유머가 빠지질 않는다. 배우 손숙이 연기한 할머니는 장손만 챙긴다. 찌는 삼복더위, 손녀가 틀어달라 아무리 애원해도 모셔만 뒀던 에어컨을 장손이 오자마자 즉각 가동시키는 소소한 일화에 관객들의 폭소가 이어진다.

오 감독은 한때 영화를 그만둘까도 생각했다. “운 적도 많아요. 영화를 찍어보니 제가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고민하던 무렵, 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비보가 날아왔다. 슬픔 대신 시나리오에 매달렸다. “제 얘기만 하려면 대자보를 쓰면 되죠. 영화로 만든 건 자전적 회고가 아니라 보편적인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가치 있는 이야기, 예술 상품으로 만들어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위 세대를 바라보는 정중한 시선도 빛난다. 할아버지가 천천히 걸어 산 너머로 사라져 가는 엔딩의 롱테이크 7분은 한 시대의 퇴장을 장중하게 잡아낸 명장면이다. 오 감독은 “식민지와 해방을 겪고 전쟁, 독재, 민주화, 디지털 시대까지를 모두 살아낸 우리 할아버지 세대를 바라보는 아래 세대의 존경이 담기도록 신경 썼다”고 말했다. “어릴 때는 집안 어른들이 무척 밉고 속물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를 먹어갈수록 저 또한 속물적이고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관객분들도 영화를 보고 위 세대를 좀 더 이해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정선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