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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토)

‘냉동인간’을 깨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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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동식의 기이한 이야기]

현실 막막해 택한 냉동 업체

깨어나보니 처우가 달라졌다

조선일보

일러스트=한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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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 인간 기술 기업 ‘보그나르’는 임상 시험 참가자를 총 10명 모집했다. 10년 뒤 깨어날 사람 6명, 20년 뒤 2명, 30년 뒤 2명. 재훈은 경쟁률을 생각해 30년 뒤를 선택했다. 예상보다 널널하게 합격했다. 인류는 냉동 인간 기술에 불신이 컸다. 신체를 냉각하면 조직 손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뇌 기능을 포함한 생물학적 구조의 온전한 복원을 장담할 수도 없었으니까. 재훈처럼 인생을 포기한 사람이 아니면 신청하지 않았다. 코인 투자 실패로 삶에 아무 희망이 없던 재훈은 냉동 인간이라는 도박에 참여했다. 만약 30년 뒤 깨어날 수만 있다면, 그 화제성만으로도 인생에 새 기회가 주어지지 않겠는가? 재훈은 망설임 없이 냉동 캡슐로 들어가 눈을 감았고, 번쩍 눈을 떴다.

“커헉!” 재훈은 거친 숨을 터뜨리며 냉동 캡슐에서 깨어났다. 그를 깨운 남자가 말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걸 축하합니다.” 남자를 돌아본 재훈의 표정이 혼란스러웠다. 방금 막 기계에 들어가서 눈을 감았는데 벌써 30년이 지났다고? 그냥 한숨 잔 것 같은데? “방금 막 냉동 인간에서 부활하셨으니 급하게 움직이지 맙시다.” 재훈은 냉동 캡슐에 누워 남자를 바라봤다. 큰 키에 깨끗한 피부, 아주 잘생긴 남자였다. 목소리도 멋있었는데, 알 수 없는 옷차림과 얼굴의 장식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제가 30년이나 잠들었습니까?” “아니오. 당신은 88년을 얼어 있었소.” “뭐라고요?” 재훈의 두 눈이 커졌고, 남자가 혀를 차며 말했다. “당신 시대 때 회사 이름이 보그나르였소? 그 회사가 망하면서 많은 인수 합병이 있었지.” “아무리 회사가 바뀌어도! 30년이라고 했는데!” “임상 시험에 참가할 때 약관을 자세히 보지 그랬소?” 재훈은 주변을 둘러봤다. 불 꺼진 어두운 창고 같은 공간에 사람이라곤 남자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 취재 온 기자는요?” “냉동 인간 깨어나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이보쇼, 88년이 지났소. 냉동 인간 기술이 얼마나 흔한 일인데.”

“그보다 당신에게 중요한 건 왜 우리가 깨웠는지요. 그냥 영영 유기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냉동 인간들을 우리가 왜 깨운 걸까?” 남자의 태도는 재훈이 위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남자는 속삭였다. “깨어난 뒤의 미래를 상상해 본 적 있소?” “예…?” “세상이 얼마나 변해있을지 말이오. 과학의 발전이 인류에게 어떤 천국을 가져다 줄지 생각해 봤소?” “지금 세상이 그렇습니까?” “한때는 그랬지. 지금은 지옥이오.”

“AI(인공지능) 혁명이 당신 시대 때 일인가? 그 이후 인류는 끝을 모르고 발전했소. 신세계가 펼쳐졌지. 중력을 이겨내며 하늘의 시대를 열었고, 신체의 한계를 기계 임플란트의 힘으로 초월했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가 펼쳐진 거요. 10년 전까지.” 남자는 쓰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원인 불명의 전염병이 돌았소. 원·인·불·명. 수많은 인간이 사망했고, 당신처럼 냉동 인간을 택했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 현대 과학이 알아낼 수 없는 전염병이라니. 그러자 사람들은 과학 대신 미신에 매달리기 시작했소. 기도하고, 무당을 부르고, 똥을 몸에 바르는 사람까지. 심지어는 말이야….”

남자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병에 걸리지 않은 순수한 인간을 솥에 끓여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돌아버린 거야.” “네?” “끔찍했지. 과학의 정점을 찍은 인류가 전염병 하나에 추한 민낯을 드러낸 거야. 그런데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효과가 없더란 말이지. 사람들은 깨달았지. 이 시대의 인류는 모두 오염됐다는 것을 말이야. 그렇다면 오염되지 않은 인간을 끓여 먹으면 되지 않을까? 어디 있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인간이?” 남자는 말을 멈춘 채, 가만히 재훈을 바라보았다.

순간 재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놀란 그의 턱이 떨릴 때,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 “맞아! 냉동 인간이 있었지! 그래서 우리가 냉동 인간을 깨우는 거야! 잡아먹기 위해서!” 재훈은 기겁하며 일어나려 했다. 냉동 캡슐을 벗어나려고 허둥댔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다는 듯 바라보던 남자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농담이야! 농담! 하여간에 이건 매번 통한다니까? 하하. 지금 시대에 누가 식인 미신을 믿겠소?”

남자의 웃음에도 재훈은 경계심을 풀 수 없었다. 남자는 웃음을 그치며 말했다. “우리가 당신을 굳이 깨운 것은 당신의 저작권이 탐나서요. 우리와 계약합시다.” “저작권…?” 재훈은 아무리 생각해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당신의 인간 저작권 말이오. 당신은 무려 88년 전의 자연산 인간이니까. 나를 보시오. 너무 완벽하지 않소? 지금 인류가 다 그렇소. 유전자 조작부터 각종 기계 이식까지, 모두 찍어낸 듯 비슷하게 완벽하지. 그래서 당신 같은 과거의 자연산 인간은 온몸이 저작권 덩어리인 거요. 특히 당신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탐난다니까? 88년 전 인간의 자연산 육성으로 ‘음성 임플란트’를 제작하면 대박이 날 테니.”

남자는 웃으며 재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게 우리가 냉동 인간을 깨우는 유일한 이유요. 개성 있는 과거에 태어난 것을 무척이나 축하하는 바요.”

※픽션입니다.

[김동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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