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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5 (금)

[김봉석의 문화유랑]조용하게, 천천히 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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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강 작가의 초상화 | 노벨위원회 홈페이지 갈무리


지인들과 만나 대화를 하다가, 첫 기억이 무엇인지 묻기 시작했다. 까마득한 기억을 되짚어봤다. 유치원으로 가던 골목길의 낡은 풍경이 기억났다. 어린 시절, 마당에서 형과 뛰어놀던 기억도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니 화사한 빛이 떠올랐다. 아마도 어릴 때 살던 집의 마루였다. 홀로 앉아 따사로운 햇살을 온몸에 가득 맞고 있었다. 옆에 누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혼자서, 조용히, 햇볕을 즐겼던 걸까. 처음으로 가장 좋았던 기억인 걸까.

이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생각하면서 근래에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고사성어를 떠올렸다. 돈과 명예에 매달리지 않고, 고요하고 평온하게 일상을 유지하며 살아가자는 정도의 의미. 오십이 넘으면 주변의 풍경이 조금씩 달라진다. 친구와 동료, 선후배의 부고를 수시로 듣게 되고, 세상의 많은 것이 나와는 무관한 세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우주의 티끌 같은 존재임을 더 많이 떠올린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지난 10일 스웨덴 한림원에서 한국의 소설가 한강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한다는 발표를 들었다. 그리고 며칠 만에 한강의 책이 국내에서 100만부가 넘게 팔렸다는 보도가 나왔다. 누군가는 유행을 따라가는 것이라며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지만 한강의 책을 많은 이가 샀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든 좋은 일이다. 작가와 출판사에 경제적인 이득이고, 책을 산 사람 모두는 아니어도 일부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을 것이다. 단 몇 사람이어도 좋다. 굳이 그들의 인생까지 바꾸지 않아도 된다. 소설에서 드러나는 질문을 한번 마음속으로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좋지 않을까. 과시라고 해도, 소설을 들춰보았다면 그것 또한 좋을 것이고.

예술이란 무엇일까. 고전적인 예술을 지나 현재의 대중적인 문화예술, 오락과 재미를 앞세운 예술까지 우리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접하고 있다. 예술의 힘, 무게라는 것은 이제 큰 의미가 없는 세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수의 생각, 주도적인 트렌드만을 중시할 필요는 없다. 인터넷 세상이 되어버린 21세기에 개인과 소수의 다양한 표현과 주장은 더욱 중요해진다. 너무 많고 시끄러워서 힘들 뿐이지, 다양성은 언제나 더 많이 필요하다. 문학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문학의 질문을 생활 속으로 받아들인 소수의 생각이 변하고 조금씩 행동이 뒤따르면 거대한 세계에도 어떤 영향을 줄 것이다. 나비효과처럼.

한강의 노벨상 수상을 반기는 이유는 단지 그의 소설을 좋아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소설에는 그의 삶이 반영되고 생각과 마음이 담겨 있다. 나는 한강이 하는 말과 행동이 좋다. ‘나는 조용히 있고 싶다. 세계에 많은 고통이 있고, 우리는 좀 더 조용하게 있어야 한다.’ 인터뷰에서 했다는 한강의 말을 지면에서 읽고, 주변을 둘러본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자아가 비대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저마다 세상만사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소셜미디어에 실어 발신한다. 악명을 쌓은 이들의 유치한 독설이나 농담이 버젓이 일간지의 인터넷판에 실린다. 저마다 독한 말을 내뱉고, 그럴듯한 말을 내던져 기사에 인용되려고 애쓴다. 유명해지기만 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한강은 다른 삶을 보여준다. 술도 안 마시고, 커피도 끊었고, 여행도 거의 가지 않는다. 좋아하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동네를 산책하고, 차를 마신다. 그의 삶이 더 좋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의 삶의 방식이 흥미롭고, 행복하고, 가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무엇에도 견주지 않고, 존재 증명을 위해 애쓰지 않는 삶. 과잉의 시대에 갇힌 우리는 간소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택하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저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행복하세요’가 아니라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최고의 덕담이 되어버린 시대. 보통의 직장인이 평생 벌어도 살 수 없는 아파트가 강남을 가득 메운 나라.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폭력적인 말이 인생의 교훈처럼 난무하는 세상에서 다르게 살아가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자기과시와 허세가 세상을 살아가는 필수적인 덕목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고요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커다란 힘이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한강의 위대한 성취에만 환호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세상의 고통을 깊이 받아들이며 자신의 길을 어리석을 정도로 조용하고 성실하게 걸어간 이의 개인적인 태도에 공감하고 박수를 보낸다.

경향신문

김봉석 문화평론가


김봉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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