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0.22 (화)

한강 소설 채운 시적 산문 ‘초혼의 목소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마련된 한강 작가 노벨 문학상 수상 기념 설치물을 시민들이 바라보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념해 한국 문학 전문가들이 이번 수상의 의미를 짚고 이를 계기로 한국 문학의 나아갈 바를 진단하는 연쇄 특별기고를 싣는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한국문학의 시간을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켰다.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사이에 존재하던 ‘시차’를 넘어서 세계 독자와 동시간대에 살게 되었다. 지난 며칠 동안 우리는 그 새로운 시간대에 적응해야만 했다. 이 놀라운 ‘시간 이동’에 낯설어하면서, 나에게는 또 다른 시간의 기억이 떠올랐다. 서울예술대학교에서 ‘직장 동료’로 함께했던 짧지 않은 시간의 기억이 다른 밀도로 떠올랐다. 아주 가끔 안산 캠퍼스에서 서울로 함께 돌아오는 일도 있었고, 그때 나누었던 대화의 문장들은 정확하게 기억날 수 없다. 하지만 바닥을 스치는 듯한 어조의 질감과 말들 사이의 공기의 감각이 우연처럼 떠오르기도 할 것이다.



이제 한강 문학 내부의 시간에 대해 말해보자. 노벨위원회의 발표에서 많이 언급되는 표현은 “혁신적인 시적 산문”이다. 이 표현은 적확한 논평이겠지만, 문학에 대한 모든 논평이 그런 것처럼 완전하지 않다. 한강은 1993년 대학을 졸업하던 그해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바로 다음해에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었다. 초기 활동은 단편소설에 집중되었고, 그 작품들은 창작집 ‘여수의 사랑’에 수록된다. 그의 시들이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 묶인 것은, 등단 20년 후 5권의 장편이 출간된 뒤의 일이다. 표면적으로는 한강 작가의 문학적 여정은 ‘시’를 잃어버리고 소설의 세계에 집중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정반대의 관점도 가능할 수 있다. 작가는 계속해서 ‘시인의 시간’ 속에 있었고 시적인 글쓰기를 진행해왔다고 말이다. 유럽에 아직 한강 작가의 시집이 번역되지 못했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면모가 덜 알려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어쩌면 ‘혁신적인 시적 산문’이라는 논평의 ‘불완전함’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한강의 거의 모든 소설들은 시적인 은유와 도약과 환상으로 가득하다. 이를테면 시 ‘어느 늦은 저녁 나는’에서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문득 알게 되는, 이 기습적인 상실감과 애도의 순간은 소설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여수의 사랑’의 도입부 “여수, 그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대고 있을 것이다”에 등장하는 여수라는 이미지는 상실의 근원지이며, 귀향의 충동은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애도 행위이다. ‘채식주의자’에서 가부장적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적인 존재가 식물로 변신하는 설명되지 않는 환상이나, ‘소년이 온다’에서 죽은 소년의 목소리가 문장으로 발화되는 것은 재래적인 소설의 규범 안에서 설명될 수 없다. 한강 장편의 또 다른 절정인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시작과 끝, 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억의 탐색에는, 우주의 신비와 생의 기원을 둘러싼 압도적인 물리학적 이미지가 등장한다.



그의 소설들은 이야기의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강렬한 이미지의 동력으로 움직인다. 한강의 독창성을 만드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무대에 등장하는 목소리의 리듬 자체이다. 한강은 ‘바람이 분다, 가라’ 출간 이후 “소설의 방식을 부수면서, 동시에 소설의 육체를 가진 소설”을 말한다. 그의 문학들은 ‘소설의 육체’를 관통하는 시적 글쓰기의 여정이다. 애도 행위는 삶의 인과관계를 배치하는 소설의 형식이 아니라, 시적인 목소리와 도약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 된다. 가령 작가가 시집에서 ‘영혼의 안쪽’을 보았다고 한 마크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 대면하는 것은, 모든 서사가 응축되어 ‘영혼의 피 냄새’를 맡은 듯한 충격이다. 악몽 같은 참혹함과 얼음 같은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이미지들과 이탤릭체로 등장하는 환청과 신음 같은 목소리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설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살아 있는 한 무거운 애도를 끝낼 수 없다면, 시적 애도의 언어들은 저 죽음들을 삶 안쪽으로 끝없이 불러낸다. 그 불러냄은 ‘초혼’의 의례처럼, 돌아오지 못하는 것들을 마침내 나타나게 하는 목소리이다. 세계문학은 지금 그 목소리의 시간 속에 있다.



한겨레

이광호 | 문학평론가·문학과지성사 대표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언론, 한겨레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행운을 높이는 오늘의 운세, 타로, 메뉴 추천 [확인하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