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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토)

사자 가족이 고기 뜯는 초원, 해는 저무는데 타이어 펑크라니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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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베 국립공원에서 사자 가족이 버팔로를 잡아먹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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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흥!” 사자의 울음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팔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해가 넘어가는 시간, 사자들의 영역에 버려진 인간 셋. 서바이벌 게임도 아닌데 우리는 여기서 맨 몸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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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인승 경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본 세계 최대의 내륙 삼각주인 오카방고 델타의 모습. 물과 뭍에서 하마떼들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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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말 나미비아에서 보츠와나로 넘어온 이후 그날 아침까지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루프탑 텐트가 장착된 사륜구동을 끌고 오카방고 델타까지 무사히 왔으니. 세계 최대의 내륙 삼각주인 오카방고 델타. 오카방고 강이 범람해 만들어진 습지 위를 달려가는 야생 동물 떼를 만나는 건 내 오랜 꿈이었다. 우리는 삼각주에서의 수상 사파리도 마친 터였다. 모코로라 불리는 2인용 쪽배를 타고 물 위에서 하는 사파리였다. 물 위에 등만 내놓은 하마를 지척에서 보는 경험이 신기했다. 게다가 중간에 내려서 걸을 수도 있었다. 차 안에 앉아서 동물들을 지켜보다가 걸으면서 코끼리며 버팔로, 하마를 바라보니 즐거울 수밖에. 다음날은 5인승 경비행기를 타고 55분간 하늘을 날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오카방고는 인간이 사라진 세계 같았다. 물가에서 쉬는 수십 마리의 하마 떼와 느릿느릿 이동하는 코끼리 무리. 모든 존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의연히 머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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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방고 델타에서 모코로라 불리는 2인용 쪽배를 타고 물 위에서 사파리를 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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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원 넘는 입장료 아깝지 않아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코끼리 고아원 ‘엘리펀트 헤이븐’. 어떤 만남은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더 나아가 한 종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생후 6주만에 엄마를 잃은 아기 코끼리 ‘날레디’는 곧 아사할 운명이었다. 날레디는 코끼리 핸들러인 보츠와나 청년 비에 의해 구조된 후 마침 그곳으로 여행을 온 미국인 부부 데브라와 스콧을 만났다. 날레디와 사랑에 빠진 세 사람은 코끼리 고아원을 설립했다. 코끼리는 인간처럼 혼자서는 성장할 수 없는 동물이다. 3시간마다 수유를 해주는 어미 코끼리를 비롯해 무리의 전적인 보호와 돌봄을 최소 5년은 받아야 한다. 이곳은 고아가 된 어린 코끼리를 구조해 5년은 우리에서 전담 핸들러가 24시간 돌보고, 다음 5년은 전기 펜스를 두른 120만 평의 땅에서 자연 적응 시간을 가진 후에 야생으로 돌려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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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고아원 ‘엘리펀트 헤이븐’에서 만난 아기 코끼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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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마리의 코끼리가 거주하는 이곳은 예민한 코끼리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하루에 두 번만 관람객을 받는다. 손님이 찾아오면 아기 코끼리들이 피딩 스테이션으로 옮겨온다. 어린 코끼리들이 귀를 팔랑거리며 스테이션으로 들어오는 순간, 우리의 이성은 빠르게 소실되었다. 코끼리 핸들러와 함께 아기 코끼리에게 먹이를 주고, 코끼리를 쓰다듬어 보는 기회라니! 우리가 넋이 나간 채 까슬까슬한 코끼리의 등을 어루만지는 동안 핸들러는 이 코끼리들의 구조 사연을 들려줬다. 코끼리가 고아가 되는 이유는 다양했다. 가뭄이나 화재, 질병과 같은 자연 재해 탓도 있지만 인간과의 갈등도 컸다. 이제 2살이 된 ‘미샤’(그녀를 구조한 의사의 이름을 땄다)가 그런 경우다. 지독한 가뭄으로 인해 인간의 마을로 내려와 물을 먹던 어미가 총에 맞았고, 혼자 남겨진 미샤를 마을 어린이들이 고아원으로 신고해 구조되었다. 2020년 봄, 석 달 사이에 330마리의 코끼리가 남조류로 오염된 물을 마시고 떼죽음을 당했다. 그때 어미는 죽고 혼자 살아남아 구조된 아기 코끼리는 생존자라는 뜻의 ‘모팔로디’라는 이름을 받았다. 조용한 성격으로 인해 ‘차분이’라는 뜻의 ‘보놀로’라는 이름을 얻은 아기 코끼리는 밀렵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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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미 게임 리저브’에서 사파리 중 마주친 얼룩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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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고아원에서는 당연히 지역 주민과 코끼리 사이의 갈등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고아원과 인접한 토지를 사들이고, 울타리로 막아 야생동물 보호 구역을 늘려가기. 지역민들과 어린이들을 초대해 교육하고, 지역 청년들을 코끼리 핸들러로 고용하기. 마을에 우물을 뚫어주고, 학교 건물을 보수하고, 스쿨 버스를 기부하기. 아기 코끼리가 3시간마다 마셔야 하는 염소 우유를 마을에서 구매하기 등. 코끼리의 서식지를 침해하지 않고도 지역을 발전시킬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애쓴다. 10만원이 넘는 입장료를 내야 했지만 전액 코끼리를 돌보는 데 쓰여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세상 어딘가에는 상아를 갖기 위해 코끼리를 쏘아 죽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아가 된 어린 코끼리를 돌보는 데 전 생애를 거는 사람도 있다니 인간이란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 종인지. 코끼리 고아원에서의 감동을 그대로 안은 채 다음날은 ‘모레미 게임 리저브’에서 육지 사파리를 했다. 코끼리 무리를 볼 때마다 고아원의 아기 코끼리가 떠오르는 시간이었다. 그 모든 투어를 진행한 에드윈은 믿음직한 현지인 청년이었다. 그가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인 초베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을 그려주며 설명했다. “하루 종일 달려야 하니까 최대한 일찍 출발해. 차는 사륜 모드에 놓고 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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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미 게임 리저브에서 자동차를 타고 사파리를 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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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가 있는 무첸제로 가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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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미 게임 리저브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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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윈이 알려준 경로는 초베 국립공원을 경유해 숙소가 있는 마을 무첸제로 가는 여정. 235㎞의 짧은 거리지만 악명 높은 모래길이라 운전 시간만 최소 7시간을 잡아야 했다. 오전 5시 반에 일어나 텐트를 접고 오전 7시가 안 된 시각에 모레미의 캠프장을 출발했다. 내내 속을 끓이게 하던 텐트가 그날따라 부드럽게 접혀 셋 다 기분이 좋았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걸 깨달은 건 1시간 넘게 모래길을 달린 후였다. 결국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2시간이 날아갔다. 이번에는 사상 최악의 모래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 경력 30년, 테니스 경력 20년의, 내가 아는 팔 근육이 가장 발달한 여자 미옥샘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길이 아닌 곳으로 올라가 버리고, 조금만 힘을 풀면 모래구덩이로 빠지게 되는 난코스. 시속 15㎞의 속도가 겨우 나왔다. 길이 아닌 곳으로 차가 올라설 때마다 눈앞의 나무를 들이받기 직전에야 핸들을 180도 이상 꺾어 빠져나오곤 했다. 팔 근육만으로 사자도 때려잡을 것 같은 그녀가 모래 웅덩이에서 몇 번을 미끄러졌는지 모른다. 이런 모래 구덩이를 2시간 넘게 달렸는데, 또 길을 잃었다! 초베에서의 셀프 사파리는 포기해야 했다. 이대로 쉬지 않고 달려도 해 지기 전에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지 불확실했으니. 어차피 지피에스(GPS)는 우리를 숙소로 데려다 줄 테니 초베는 포기하고 달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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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미 게임 리저브의 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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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 그토록 감탄하며 바라본 코끼리들이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데 지켜볼 정신도 없었다. 농담도 잊은 채 굳어버린 미옥샘이 6시간 반을 내리 운전했을 때 린얀티 게이트가 나왔다. 초베 국립공원의 가장자리였다. 길은 여전히 모래길이었지만 조금 나아졌다. 이번에는 형란샘이 운전대를 잡았다. 두 사람은 운전 스타일이 극과 극이었다. 평소 야생과 문명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내 혼을 쏙 빼놓는 미옥샘은 운전대만 잡으면 새색시로 돌변. 포장 도로에서 눈앞에 거대한 화물 트럭이 시속 40㎞로 달리고 있어도 추월할 엄두를 못 내는 극단적인 방어 운전. 내가 붙인 그녀의 별명은 이쫄보 여사. 목소리 올라가는 일이 없는 차분함의 대명사 형란샘은 핸들만 잡으면 레이서로 빙의. 전생에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전차라도 몰았던 걸까. 추월을 밥 먹듯이 하는 그녀의 별명은 김추월 여사. 김추월 여사의 질주 본능은 모래길에서도 꺼지지 않았다. 미옥샘이 양 손으로 창문 옆 손잡이를 꼭 붙든 채로 중얼거렸다. “이러다 펑크라도 나면 차에서 자야 되는 거 아니야?” 그때만 해도 몰랐다. 이 분이 말만 하면 씨가 되는 기적을 일으키는 중이라는 걸. 박진감 넘치는 사막 랠리 주행을 하던 김추월 여사, 거대한 모래 구덩이를 보지 못했다. 내가 어, 어, 하는 동안 차는 깊은 구덩이로 돌진한 후 굉음을 내며 빠져나왔다. 그 순간, 선명히 들려오는 ‘슈슈슈욱~’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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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세워서 봐야겠어요.” 먼저 내린 미옥샘이 입을 틀어막으며 주저앉았다. “엄마야. 타이어 펑크 났다. 우째야 하나.”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문제는 이 엄청난 사고가 늦은 오후에, 인적이라곤 없고 야생 동물만 가득한 초베 국립공원에서 일어났다는 점. 도움을 요청할 곳도 없고, 허비할 시간도 없었다. “타이어 갈아요!” “우리가 어떻게 타이어를 가노. 못 한 대이.” “렌트하던 날 배웠잖아요. 동영상 찍어놓은 거 보면서 해봐요.” 나는 차로 뛰어들어 장비가 있는 뒷좌석의 줄을 당겼다. 하늘은 내 편이 아니었다. 한쪽의 줄은 쉽게 당겨지는데 반대쪽은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차가 충격을 받으면서 레버가 뭔가에 걸린 것 같았다. 다시 판단을 내려야 했다. 시간은 이미 오후 4시를 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 사자라도 만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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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베 국립공원에서 사자 가족이 버팔로를 잡아먹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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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큰 길이 나오는 삼거리까지 걸어가서 다른 차를 기다려요. 헤드랜턴, 비상식량, 물이랑 따뜻한 옷 챙기고 텐트 폴대 꺼내요.” 우리는 폴대를 무기인 양 하나씩 들고 삼거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해 지기 전에 지나가는 차를 잡을 수 있을까. 불안과 초조함으로 뛰는 심장을 손으로 눌러가며 걸었다. 미옥샘이 말했다. “이러다 지나가는 차를 놓치면 그야말로 영화다, 그제?” 어쩐지 입을 틀어막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삼거리에 도착했지만 사람도 차도 보이지 않았다. 캠핑장까지는 8㎞. 걸어서 2시간 길인데 곧 해가 지는 상황이라 일몰 후에도 1시간을 걸어야 했다. 초조감으로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어떡해야 하지. 여기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다 내 책임인데. 이곳이 국립공원만 아니라면 셋이니까 야간행군을 해도 겁나지 않을 텐데, 여기는 사자가 득실거리는 그들의 영역이었다. 걸을 수도 없고, 걸어서도 안 되는 곳이었다. 우리는 동물의 왕국에 맨 몸으로 서 있었다. 무기라고는 텐트 폴대 하나씩을 든 채.



“일단 사람들이 있을 캠핑장으로 가봐요.” 캠핑장으로 가는 길은 좁고 수풀이 우거지고 시야가 닫힌 길이었다. 이대로 가다가 사자라도 만나면 어쩌나. 마른 풀 밟는 소리 너머 희미한 차소리가 들렸다. 달리면서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헬로우! 헬프미!” 차소리는 다가오는 듯 싶다가 멀어졌다. 미옥샘 말대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일이 일어난 셈이었다. 차를 쫓아 나오다 보니 다시 아까의 삼거리였다. 미옥샘은 안전한 차로 돌아가자고 하는데 내게는 차 안에서 구조를 기다리며 밤을 지새는 일이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밤길을 걸어 캠핑장까지 가는 위험과 차 안에서 밤을 새는 위험 중에 선택해야 하는데 마음은 갈팡질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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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리는 동물의 왕국 ‘초베 국립공원’에서 텐트 폴대를 호신용 무기 삼아 들고 걸어가는 일행 중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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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차로 돌아가기로 했다. 해는 이미 기울기 시작했다. 자책과 후회가 밀려들었다. 온갖 부정적인 상상으로 머릿속이 지옥이었다. 내 안의 공포와 싸우며 걸어가는데 미옥샘이 소리쳤다. “저기 저 눈 보여? 저거 맹수의 눈이잖아요. 안 보여?” 군대 면제 시력인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고, 형란샘도 안 보인다고 했다. 그 순간 가까이서 낮고 선명하게 들려온 으르렁 소리. 우리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차가 있는 곳까지의 3.4㎞는 지구의 끝으로 가는 것처럼 아득했다. 뛰었다가는 그 소리가 사자를 자극할까봐 경보하듯 걸어 차로 돌아왔다. 차 문부터 잠그고나니 그제야 숨이 가빴다. 구조를 요청하려고 걸어갈 때는 그렇게 빨리 흐르던 시간이 차 안에서는 다른 속도로 흘렀다. 이대로 밤을 지새게 되는 걸까. 새로운 불안이 짙어질 무렵, 희미한 차소리가 들려왔다. 비상등을 켜놓고 달려나갔다. 거대한 트럭에서 군복을 입은 젊은 남자 2명이 내렸다. 다가온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는데 한 명에게서 지독한 술냄새가 훅 끼쳤다. 사자 피하려다가 인간에게 잡아먹히는 건 아닐까 다시 공포가 밀려왔다.





글·사진 김남희 여행가



여행가 김남희는 2003년 이후 유목민의 삶을 살아오고 있다. 언젠가는 앉아서 유목하는 경지에 오르기를 바라면서, 지은 책으로는 ‘길 위에서 읽는 시’, ‘여행할 땐, 책’,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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