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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일)

‘최고 영화’ 이렇게 엇갈린다고?…베니스는 죽음·칸은 웃음 택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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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황금사자상 ‘룸 넥스트 도어’
병마에 지쳐 生 포기한 여성
“죽는 순간 옆방에 있어달라”
친구에 부탁하고 함께 지내

죽음과 삶에 대한 깊은 사유
명배우 열연·미장센 탁월해


매일경제

영화 ‘룸 넥스트 도어’ 한 장면. 암이 뼈로 전이돼 시한부 인생인 마사(틸다 스윈튼)는 친구 잉그리드(줄리안 무어)에게 “자신이 독약을 삼킬 때 옆방에 있어달라”고 부탁한다.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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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웃음은 서로 만나기 어렵다. 망자의 검은 관 앞에서 환하게 미소짓는 이는 없으며, 웃음이 죽음의 이미지와 연결되는 일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웃는다 해서 그 미소가 매번 가벼운 것만은 아님을 우리는 안다. 때로는 웃음도 죽음처럼 서늘한 진실을 내포할 때가 있다.

올 가을 한국 극장가는 ‘죽음’과 ‘웃음’을 소재 삼은 두 영화가 만난다. 하나는 끝없이 정적이고, 하나는 한없이 동적이어서 두 영화로 양극의 대조를 이루는데, 공교롭게도 세계 최고 영화제인 프랑스 칸영화제와 이탈리아 베니스영화제에서 올해 ‘1등상’인 황금종려상, 황금사자상 트로피를 나란히 거머쥔 작품이란 점에서 묘한 경쟁의 기운이 감돈다. 칸과 베니스, 승자는 누굴까.

먼저 2024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룸 넥스트 도어’부터.

뉴욕타임스 바그다드 종군 특파원 출신의 마사(틸다 스윈튼)는 지금 자궁경부암 3기다. 치료를 시도하지만 결과는 기대를 벗어났고, 암세포가 뼈로 전이되며 죽음이 불가피하다. 자신을 잃은 채로 죽어가기는 싫다. 어느 날, 오래 전 마사와 잡지사에서 일했던 친구 잉그리드(줄리안 무어)가 마사의 병실을 찾는다. 미혼모 마사가 10대에 낳았던 딸은 오래 전 그녀와 절연했고, 그녀를 도울 주변인이 없음을 잉그리드는 안다.

그런데, 마사가 잉그리드에게 믿기 어려운 부탁을 한다.

“나는 삶을 포기했어. 내가 떠나는 그 순간에, 옆방(제목 The Room Next Door)에 있어줘.”

친구의 ‘자살 예고’도 납득하기 어려운데, 그 순간 옆방에서 자신이 홀로 있음을 느끼지 않게 해달라는 마사의 부탁은 잉그리드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러나 마사의 간절한 부탁에 잉그리드는 마사의 제안을 수용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다. ‘언제, 그리고 어디서 죽어야 할까?’

마사는 잉그리드에게 “아침에 내 방문이 닫혀 있으면 그때가 바로 떠났다는 신호”라고 말한다. 잉그리드는 마사와 외딴 숲에서 매일 주어진 하루를 이 세계의 마지막날처럼 지내고, 새벽이면 마사의 방문을 숨죽여 본다. 오늘도 열려 있을까, 오늘은 닫혀 있을까.

영화는 삶과 죽음에 관한 농밀한 사유를 벽돌처럼 축적한 검은 대성당 안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제임스 조이스의 ‘죽은 사람들(The Dead)’의 한 구절이 인용되는데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눈이 내린다”는 대목이 이르러선 가슴 속 한 줄의 눈물이 불가피하다.

따지고 보면, 잉그리드만이 어찌할 도리가 없어 죽음을 선택한 마사의 ‘옆방’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죽음의 옆방이다. 이 세계 전체가 죽음의 옆방이며, 문이 닫히면 생은 종결된다. 인간은 모두 그 방문의 손잡이를 잡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영화는 이야기한다. 에드워드 호퍼 풍의 미학적 구도로 장면 전체를 꽉 채운 연출도 감탄을 자아낸다.

질병으로서의 암에 관한 마사의 사유까지도, 암을 경험한 모두의 공감을 살 법하다. 암은 세상에서, 악하고 해치워야 하는 무엇으로 인식된다. 암은 맞서야 하는 것, 맞서지 않는 자세는 굴복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질병 자체를 ‘정신적 성장의 기회’로만 여기는 세상에 대해 마사는 “난 강하지 않다”고 외친다. 이것은 나약한 포기가 아니라, 인간의 솔직한 비명이 된다.

칸 황금종려상 ‘아노라’
성매매 종사하던 스트리퍼
러 재벌가 청년과 ‘섹스 계약’
장난삼아 혼인신고했다 발칵

시종일관 폭소터지는 골계미
웃음이면에 계급모순 담아
매일경제

영화 ‘아노라’의 한 장면. 성매매 스트리퍼 아노라(미키 매디슨)은 철부지 재벌가 아들 이반(마크 아이델슈테인)과 결혼하면서 ‘섹스토이’에서 신데렐라가 된다.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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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룸 넥스트 도어’와 달리,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아노라’는 관객이 느끼는 감정의 질감이 확연히 다른 영화다. 폭소가 1분 간격으로 터져나올 만큼 ‘웃긴’ 영화여서다.

주인공은 미국 뉴욕에서 성매매로 먹고 사는 스트리퍼 아노라(미키 매디슨).

아노라는, 자신이 일하는 바를 찾은 러시아 재벌 아들 이반(마크 아이델슈테인)의 총애를 얻고 ‘주급 1만5000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이반의 대저택에 들어가 살기로 한다. 플레이스테이션과 섹스만이 취미인, 이제 막 스무살을 넘긴 이반이 원하기만 하면 아노라는 언제든 섹스를 허락해준다. ‘살아 있는 섹스토이.’

둘은 급기야 장난 삼아 혼인신고까지 해버린다. 아노라는 자신이 신데렐라로 신분이 상승했다고 믿지만,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이반의 부모는 하수인 3인방을 보내 혼인을 무효화시키라고 말한다.

문제는 어지러운 난투 중에 이반이 해결도 없이 가출해버린 것. 하수인 셋과 아노라는 차를 타고 이반을 찾아 길을 떠난다. 하수인 셋은 이반을 찾아 고용주의 뜻을 관철시켜야 하고, 아노라는 이반에게서 인정을 받아 결혼생활의 정당성을 입증받아야 한다. 이반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결코 쫓겨나지 않겠다며 ‘발악’을 하는 아노라와, 그녀의 주먹질과 난동에 코가 부러져 부상당한 하수인의 ‘결전’은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그러나 한참을 웃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이 영화가 단순한 킬링타임용 하급 코미디 영화가 아님을 직감하게 된다.

하수인 셋과 아노라는 그들을 고용한 상위 권력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서로를 ‘꺾어야’ 하는 하층민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는 현대사회의 계급 모순을 코믹한 방식으로 은유해낸 ‘기생충’ 급의 걸작이다. 박사장 부부는 늘 평온히 거실에 머물지만 기택 부부와 문광 부부는 지하실에서 전쟁을 벌이지 않았던가.

션 베이커 감독의 이름을 유심히 기억해야 한다. 그는 ‘디즈니랜드 바로 건너편 모텔에서 사글세를 내고 숙식하는 빈민층 아이들’을 다룬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로 젊은 거장의 반열에 이미 올랐다. 성매매 여성, 포르노그라피 남주인공 등 현대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밝은 색채와 예리한 관찰력으로 그려내 세계 영화팬들의 찬사를 받았다.

‘아노라’는 그가 20년 넘게 추구해온,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영화의 정점에 선 작품이다. 아무 생각없이 보다가 아노라가, 하수인 셋이 바로 ‘나’라는 충격을 가슴에 품고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이 극장 문을 나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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